제목 | 이경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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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 역사인물 |
내용 | 이조말엽(李朝末葉) 풍운(風雲)을 구하던 정치가 이경재(李景在) 홍도원(紅桃源)동쪽 아차산(峨嵯山) 기슭에 묘가 있는데 이 묘가 이조말엽(李朝末葉) 헌종(憲宗)때 부터 고종(高宗)때 까지의 문신인 이경재(李景在)의 묘다. 그는 본관이 한산(韓山)이며 자는 계행(季行)이고 호는 송서(松西) 초은(招隱)이고 익호(謚號)는 문간(文簡)이다. 현감 이의신(李義臣)의 아들로 정조(正祖) 20년(1800)에 태어나서 순조(純祖) 20년(1820)에 문과에 급제 규장각 직학 예문관제학 이조참판(吏曹參判) 부제학(副提學) 대사헌(大司憲)을 역임했다. 철종(哲宗)이 즉위한 1849년에 사은사(謝恩使)로 청(靑)나라에 다녀와서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도 청(靑)나라에 다녀오고 상의군 (上議軍)을거쳐 우의정(右議政)을 지냈다. 안동김씨(安東金氏)들이 득세한 조정에서는 그들은 그들대로 조정에서 영화를 누렸지만 농민은 농민들대로 관의 시달림에 참지못하고 농민봉기가 끊이지 않을때였다. 대개의 경우 관인들의 노략질은 심해갔고 상인들의 속임수자 많아졌으며 오래도록 지방의 양반들이 득세하여 농민을 괴롭힐 때 조정에서는 암행어사(暗行御史)를 보내어 조사토록하고 그 뒤는 선무사(宣撫使)를 보내어 백성을 위로 하였었다. 당시만 하여도 암행어사(暗行御史)가 열사람이나 되었으나 어사들이 지방 수령들에게 대접을 받는세우러로 변했으니 그래서 「개쏘다니듯 하는 암행어사」라는 말이 떠돌게 되었다. 이경재(李景在)는 안동김씨(安東金氏)의 치마폭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왕(王)의 정사가 못마땅 하였지만 어쩔수가 없었다. 무슨 일이고 한꺼번에 개혁한다는 것도 어려운 일이고 해서 지방 수령들의 노략질을 막아보기위해 노력을했었다. 백성들의 원성은 지방 아전들의 노략질과 지방감사들의 치부(致富)와 나아가서는 조정에 목숨을 걸고있는 대감들의 치부(致富)에 있었다. 농민들은 환곡을 쌀겨로 넘겨줘도 허리띠를 졸라매고 말문을 못열었었다. 원래가 윗쪽에서 부패하면 아랫쪽은 더욱 노략질하는 것이 어느나라를 막론하고 관(官)의 풍습이어서 더욱 착취가 심해지자 드디어 농민들은 봉기하기 시작한 것이다. 농민이 봉기하면 조정에서는 그 농민들을 때려잡으라 했었다. 허나 굶어 죽게된 농민들이 관(官)의 착취에 목숨을 걸고 반항해 오는데에는 조정에서 여러 대감들게 말한 시정책의 건의를 보드라도 이때의 상황을 잘 알수가 있다. 『사람이 먹을것이 없으면 도적질하기 마련이고 나쁜사람에게도 네가 나쁘다고 자꾸 닥치면 더 나빠집니다.」 더구나 재산을 모으는 사람이 쌀가마니를 한섬에서 열섬, 열섬에서 천섬으로 쌓아 올리는 데에도 농민과 똑같은 피땀을 흘려야지 농사도 짓지않는 관인이 쌀을 천석쯤 쌓아놓았다. 해서 「참농사 잘 지었구나」할 한사람도 없습니다. 농민들은 농사를 지어서 먹고 살아야 하는데 농사도 짓지않는 관인들이 어떤 명목으로도 농민의 곡식을 걷어가고 농사를 지은 농민은 죽도 못먹는데 관인들이 쌀로 술을 빚어 마시고 떡을 만들어 먹고 노는데 어느 농민의 눈에서 피눈물이 나지 않겠습니까? 시정하여야 되옵니다. 세상이 바뀌어지고 있습니다.』 그는 안동김씨의 권세를 의식하고 조심성있게 개혁을 주장했었다. 그래서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해보겠다고 생긴 관청이 이정청이란 기관이었다. 허나 대담하지 못한 그는 안동김씨들의 소굴에서 크게 일은 하지 못했었다. 그래서 농민이 봉기할때마다 봉기하는 사유를 자세히 설명하고 시정을 외쳤을뿐 자기만은 농민을 동정한 그였다. 자기집에 들어오는 탐관오리들은 호통을쳐서 문전에서 내쫓았고 농민들에게 쌀을 나누워줘 광이 텅텅 빌때가 자주 있었다는 정치가였다. 고종(高宗) 1년에 사신으로 청나라에 다시 한번 다녀왔으며 늙어선 奉賀朝가되였었다. 양심이 있는 자는 백성과 정을 나누는 자라고 노략질하는 탐관오리들을 깨우치게 한 그였으나 그것이 끊일사이 없는 세월속에 눈을 감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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