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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의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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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의 문화 글의 상세내용
제목 동지역
구분 지명유래
내용 大 川(대천)

백제(百濟)때는 신촌현(新村縣) 사촌현(沙村縣)이라고도 부른다)에 속했으며, 신라(新羅)때는 신읍현(新邑縣)에 속해서 결성군(潔城郡)의 영현(領縣)이였었다. 고려(高麗)때는 보령현(保寧縣)에 속했으며 조선(朝鮮)때에도 보령현(保寧縣)에 속했었다. 조선말엽(朝鮮末葉)엔 보령군(保寧郡)의 지역(地域)으로서 목충면(睦忠面)이라 하여 죽동(竹洞)외 10개(個) 동리(洞里)를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行政區域) 개혁(改革)때 우라면(于羅面)의 궁촌(宮村) 외 26개(個) 동리(洞里)와 남포군(藍浦郡) 북내면(北內面)의 후동(後洞)을 병합하여 이곳에 흐르는 한내(大川)의 이름을 따서 대천면(大川面)이라 하였다. 대천면(大川面)이 급속히 발전한 것은 철도(鐵道)가설에 따라 역(驛)이 생기고 군청소재지(郡廳所在地)가 이곳에 옮기면서 부터이며 그후 대천해수욕장(大川海水浴場)의 개발로 더욱 발전을 거듭하였고 성주산(聖住山)에 석탄광산(石炭鑛山)이 자리하면서 부터 급속히 발전한 고을이다. 1962년 11월 21일에 읍(邑)으로 승격(昇格)되고 신흑(新黑) 요암(蓼庵) 남곡(藍谷) 내항(內項) 궁촌(宮村) 명천(鳴川) 동대(東垈) 화산(花山) 죽정(竹亭) 대천(大川) 10개리(個里)를 관할하며 보령군(保寧郡)에 편입(編入)되었다. 이후`95 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로 개명된후 보령시에 편입되었음.

大川洞(대천동)

백제(百濟)때는 신촌현(新村縣)에 속했었다. 신라(新羅)때는 신읍현(新邑縣)에 속했으며 고려(高麗)때는 보령현(保寧縣)에 속했었다. 조선(朝鮮)때에도 보령현(保寧縣)에 속했으며 이조말엽(李朝末葉)엔 보령군(保寧郡) 목충면(睦忠面)의 구역(區域)으로써 (한내) 또는 대천(大川)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行政區域) 개혁(改革)때 갈두리(葛頭里) 신평리(新坪里) 쌍암리(雙岩里) 관촌(冠村)을 병합하여 대천리(大川里)라고 하고 이름을 따서 대천면(大川面) 대천리(大川里)라 하였다가 1962년에 대천읍(大川邑)으로 승격됨에 따라 대천읍(大川邑) 대천리(大川理)가 되었고 `1986년1월 1일 법률 제3798호로 대천읍이 대천시로 승격되어 대천시에서 편입되었다가 `95 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로 개명된후 보령시 원동,대관동에 속해있다가 보령시 조례 제368호에 의거 원동이 대천1동으로 대관동이 대천2동이 변경되어 여기에 속하게 되었음.

샛 터

대천천변(大川川邊)에 신시(新市)와 속하여 있는 동리(洞里)까 샛터다. 이곳은 충청우도보령목충면신평리(忠淸右道保寧木忠面新坪리)라 하는 한촌(寒村)으로 천변(川邊)에 의한 고로 수재(水災)등 많은 수난이 있어 매년 노제(路祭)를 지내왔다. 상고(上古)의 기록은 고찰할 방도가 없으나 상존(尙存)하는 족문(族文) 악차(嶽次)에 의하면 경인정월(庚寅正月)운운함을 요컨데 약150년전부터 지금까지 이어내려오고 있으며 처사(處士)로 이성구(李聖九) 이창식(李昌植) 선생이 사셨다.

할 미 섬

지금까지 간척지 안에 들어있는 섬을 할미섬이라고 부른다. 옛날 갱구할미가 주포(周浦面) 용(龍)머리에서 왕대산(王臺山)으로 바다를 건너 왕래할 때 이 바위에서 쉬어갔다 한다. 지금 그 발자국이 남아있는 섬인데 간사지를 막을 때 섬을 헐어서 섬 형체만 남아있다. 이곳에는 간척지 개척에 공로가 있는 이상락 선생의 공적비가 있다.

구 장 터

대천(大川) 남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구장터」라고 부른다. 옛날부터 시장(市場)이 있었는데 1914년에 「새장터」로 옮겨 갔다. 그래서 「구장터」라고 부르며 이곳에 박영삼 선생이 사시다가 삽시도의 개척자가 되셨다.

小 美(소미)

쌍암(雙岩) 서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소미(小美)라고 부른다. 지금으로부터 100여년전 한산이씨(漢山李氏)와 고령신씨(高靈申氏)들이 의좋게 살던 마을이라 인근에서는 양반의 행패가 심했으나 이 마을은 온화한 미덕이 있어 소미(小美)라고 불렀다 한다.

대승사(大 乘 寺)

신시(新市) 북쪽으로 풍봉심(風鳳心)에 남향(南向)하여 절이 있는데 과거(過去) 왜구(倭口) 공(孔)터에 정해년 2년9일에 젊은 승려 이종천이 세우고 대승사라 불렀다. 지금도 혹신사밑이라 부르고 있으며 6.25당시 변(變)을 당한 영령의 위령비와 충혼각이 있다.

쇳 개

대천리(大川里)남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마을을「쇳개」「샛개」라고 부른다. 옛날엔 모래더미가 쌓여있었던 곳인데 지금은 「구시배터」라고도 부른다. 구잡터와 연하여 있으며 강태우 선생이 사셨다.

갯벌모퉁이

바닷가에「갯벌모퉁이」라는 곳이 있다. 옛날엔 이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와서 갯벌이었는데 「갯벌모퉁이」에만 샘이 있어서 육수가 나왔다 한다. 옹달샘이 있어서 이곳 갯밭에서 조개와 게를 잡던 사람들이 쉬는 자리였다 한다. 한 모퉁이에 자리해 있다해서 「갯벌모퉁이」라고 부른다.

갈머리

새장터 동북(東北)의 풍봉산(風鳳山)록에 동탕(東湯)을 위갈머리라고 부르며 한양조씨(漢陽趙氏)의 구묘(舊墓)가 있으며 이풍구 선생(李豊求 先生)이 사셨으며 이진구 선생(李珍九 先生)의 고택(古宅)이 있다. 또 서탕(西湯)을 아래갈머리라고 하는데 이토향 선생(李土享 先生)이 이 앞을 철마(鐵馬)가 지나갈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곳이다. 선조(宣祖) 32년 예판(禮判)을 지낸 영의정 이산해(領議政 李山海)의 손자(孫子)되는 과암공 묘소(果菴公의 墓所)가 있고 12대(代)370년간을 살며 9대진사(代進士)를 지냈다는 진사택(進士宅)이라 붙이는 고택(古宅)이 있으며 이택규 선생(李宅珪 先生)이 사시던 곳이다.

군둘재

관촌(冠村) 2구(區)에 자리한 고개를 「군둘재」라고 부른다. 동학난(東學亂)때도 동학군(東學軍)이 진을 쳤던 자리이며 그 당시 고개 골짜기에서 사람을 죽이기도 했었다. 일제(日帝)말기에도 왜군(倭軍)들이 이 고개에다 진을 치기도 한 고개인데 군사가 진을 치는 고개라 「군들재」라고 부른다.

새장터(신시)

속칭 대천하면 이곳을 말하는데 보령군청소재지이며 각기관과 장항(長項) 서울간의 대천역(大川驛)이 있고 원래는 동대리목장(東垈里木場)(나무장터)과 사이에 대천천(大川川)이 가로질러 큰 다리가 있었고 낚시와 수영을 즐겼으며 익사자가 생길정도로 큰 내였던 것을 매립(埋立)하여 대천천(大川川)을 목장후향 현위치(木場後向 現位置)로 돌리고 택지(宅地)를 조성(造成)하여 현보령군청(現保寧郡廳)앞에 있던 읍청사(邑廳舍)와 경찰서(警察署)앞에 있던 문화원(文化院)을 현위치(現位置)로 옮겼으며 경찰서(警察署)옆에 있는 망초대는 6.25 당시 축소(當時 築造)한 것으로 유물화되었으나 언젠가는 없어질 것이지만 기록하여 둔다. 당시(當時)는 현보령군청청사(保寧郡廳廳舍)와 경찰서(警察署)가 목조고가(木造古家)였으며 대천 등기소(大川 登記所)가 군청(郡廳)앞 읍사무소(邑事務所)와 속(屬)하여 있던 것을 현위치(現位置)로 옮겼고 大川(대천)우체국은 현 대남학교앞 네거리에 있던 것을 현위치(現位置)로 옮겼다. 구(舊) 우체국앞에 읍공관(邑公館)이 있었는데 헐어 없어지고 명사(名士)로는 이경구(李經九), 김현국(金顯國), 김현석(金顯碩), 손찬희, 김윤배(金允培), 임석규, 김상역, 여류명사로 최태선 선생이 살았다.

왜정초(倭政初)에 조성(造成)된 시가지이기 때문에 수많은 일인(日人)이 거주(居住)하여 왜정(倭政)에 항거하는 표적(標的)이 되어 알륵이 극(尤)심하였으나 패망후 귀국 당시(敗亡後 歸國 當時)에는 장자(長者)의 도량으로 조용히 후(厚)하게 귀국(歸國)시켜 줌으로써 그들은 고마움을 잊지못하여 수차사공 방문(數次謝孔 訪門)하는 예(例)까지 있어 만세보령(萬世保寧)의 본(本)고장이기도 하다.

쌍 바 위

大川(대천) 서쪽으로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를 「쌍바위」라고 부른다. 큰 바위가 쌍으로 서있다 해서 「쌍바위」라고 부른다. 쌍바위 아래에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쌍바위 「지명」따라 「쌍바위」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산제당(山 祭 堂)

신시지방 풍봉산(地方 風鳳山) 중턱에 산제당(山祭堂)이 있어 기우제(祈雨祭)등 용비안택(龍飛安宅)을 빌고 있다.

죽정동(竹亭洞)

백제(百濟)때는 신촌현(新村縣)에 속했었다. 신라(新羅)때는 신읍현(新邑縣)에 속했으며 고려(高麗)때는 보령현(保寧縣)에 속했었다. 조선(朝鮮)때에도 보령현(保寧縣)에 속했으며 이조말엽(李朝末葉)엔 보령군(保寧郡) 목충면(睦木面)의 지역(地域)인데 1914년 행정구역(行政區域) 개혁(改革)때 회두리(回頭里), 독정리(篤井里), 중보리(中洑里), 죽동(竹洞), 지장동(地藏洞)을 병합하여 죽동(竹洞)과 독정(篤井)의 이름을 따라 죽정리(竹井里)라 하여 대천면(大川面)에 편입(編入)되였다가 읍(邑) 승격(昇格)에 따라 대천읍(大川邑)에 편입(編入)되었고 `1986년1월 1일 법률 제3798호로 대천읍이 대천시로 승격되어 대천시에서 편입되었다가, 이후`99 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로 개명된후 보령시에 편입되었음.

가 는 골

죽동(竹洞) 북쪽에 골짜기가 있는데 이 골짜기를 「가는골」이라고 부른다. 골짜기가 가느다랗게 생겼다 해서 「가는골」이라고 부른다.

대 락 골

「독정이」남면(南面)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대락골」이라고 부른다. 대나무가 많은 마을이라 「대락골」,「죽동(竹洞)」,「누동」이라고도 부른다.

높은마당

「대락골」남동(南東)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마을을「높은마당」이라고 부른다. 마을 지형(地形)이 높은 마당처럼 생겼다 해서 「높은마당」이라고 부른다.

당산(堂 山) 말

죽동(竹洞) 동쪽으로 골짜기가 있는데 이 골짜기를 「당산밑」이라고 부른다. 골짜기에 칠성당(七星堂)이 있었다 해서 「당산(堂山)밑」이라고 부르는 골짜기이다.

대 성 뫼

「대락굴」서남(西南)쪽으로 자리한 산들「대성뫼」라고 부른다. 절터가 있는 산인데 「퇴미봉」,「대성뫼」라고 부르는 산이다.

대숲모랭이

「대락굴」남서(南西)쪽에 모롱이가 있는데 이모롱이를 「대숲모랭이」라고 부른다. 대나무가 많은 곳의 모퉁이라 「대숲모랭이」라고 부른다.

뚝 안

죽동(竹洞) 서남(西南)쪽으로 들이 있는데 이 들을 「뚝안」이라고 부른다. 뚝안쪽에 들이 있다고 해서 「뚝안」이라고 부르는 들이다.

반 송 터

중보(中洑) 중앙에 반송(盤松)터가 있다. 옛날 소반같은 반송(盤松)이 있었던 자리라 「반송이」라고 부른다.

방아날이

죽동(竹洞) 북(北)쪽에 골짜기가 있는데 이 골짜기를 「방아날이」라고 부른다. 골짜기의 모양이 방아처럼 생겼다해서 「방아날이」라고 부른다.

방아다리

「대락굴」앞에 다리가 있는데 이 다리를 「방아다리」라고 부른다. 옛날에 물레방아가 있었고 다리가 있었는데 물레방아가 있는 다리라 「방아다리」라고 부른다.

벌 터

「고장」 동남(東南)쪽 벌판에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벌터」라고 부른다. 마을이 벌판들에 있다해서 「벌터」라고 부른다.

불 당 골

죽동(竹洞) 북(北)쪽으로 골짜기가 있는데 이 골짜기를 「불당골」이라고 부른다. 전에 불당이 골짜기에 있었다 해서 「불당골」이라고 부른다.

세 집 매

「높은마당」 북(北)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세집매」라고 부른다. 세갈래로 갈라지는 길 주변에 집이 세집 있었다 해서 「세집매」라고 불렀는데 지금은 주택단지화해서 「신설동」이라고 부른다. 소삼(小三)이라고도 불렀었다.

숙 청 이

「높은마당」 동북(東北)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숙청이」라고 부른다. 「참나무」라고도 부르는 마을인데 「참나무숲」이 있었다는 마을이다.

열푸쟁이

「높은마당」서남(西南)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열푸쟁이」라고 부른다. 「여포」,「열푸쟁이」라고도 부르는 마을이다.

중보(中 洑)

「높은마당」동북(東北)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중보(中洑)라고 부른다. 마을에 보가 있다해서 중보(中洑)라고 부르며 이 곳에서 이철승(李哲升), 이성범 선생(李聖範 先生)이 훈학(訓學)하여 많은 제자(弟子)를 가르쳤다.

지 장 굴

「높은마당」서(西)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지장굴」이라고 부른다. 지장동(芝場洞)이라고도 부르는데 이조초협(李朝初葉)에 한 왕비(王妃)가 전라도(全羅道)로 행차하는 길에 이곳을 지나가는데 칡넝쿨이 많아서 칡넝쿨을 걷느라고 잠시 쉬었을 때 왕비(王妃)가 한 풀을 발견하였는데 그게 지장이라 부르는 풀이었다 한다. 그래서 그후부터 지장풀과 지장열매가 많은 마을이라 「지장골」「지장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데 지금 신흥사에 있는 부근이라 전한다.

청석정(靑 石 亭)

「대락굴」어구에 느티나무가 서있고 그 아래로 靑石이 있는데 여기를 「청석정(靑石亭)」이라고 부른다. 옛날에는 그 아래에 소(沼)가 있어서 낚시터였다 한다.

호랑이터거리

「봉봉」동(東)쪽에 있는 바위를 「호랑이터거리」라고 부른다. 옛날에 호랑이가 이 바위에서 턱거리를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 바위다.

회 두 리

「높은마당」 동북(東北)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회두리(回頭里)라고 부른다. 마을 지형(地形)이 머리를 돌이킨 것처럼 되어있다 해서 회두리(回頭里),회두(回頭)라고 부른다.

마미산(馬 米 山)

독정(篤井)마을에 자리한 산이 있는데 이 산을 마미산(馬米山)이라고 부른다. 고려말엽(高麗末葉)에 왜구들이 쳐들어 왔을 때 이곳 사람들이 의병(義兵)을 일으켜 이 산에서 적을 무찌른 산이다. 그때 짚으로 엮은 나래로 산을 덮어 말의 먹이인 풀처럼 보이게 하였다 하여 마미산(馬米山)이라고 부른다.

화산동(花山洞)

백제(백제)때는 신촌현(신촌현)에 속했었다. 신라(신라)때는 신읍현(新邑縣)에 속했으며 고려(高麗)때는 보령현(保寧縣)에 속했었다. 조선(朝鮮)때에도 보령현(保寧縣)에 속했으며 조선말엽(朝鮮末葉)엔 보령군(保寧郡) 목충면(睦木面)의 구역(區域)인데 1914년 행정구역(行政區域) 개혁(改革)때 동산리(東山里), 괴동(槐洞), 소정리(邵亭里), 대곡리(大谷里), 화현리(花峴里)를 병합하여 화현(花峴)과 동산(東山)의 이름을 따서 화산리(花山里)라 하여 대천면(大川面)에 편입되었다가 읍(邑) 승격(昇格)에 따라 대천읍(大川邑)에 편입(編入)되었고. `1986년1월 1일 법률 제3798호로 대천읍이 대천시로 승격되어 대천시에서 편입되었다가, 이후`99 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로 개명된후 보령시 대천1동에 편입되었음.

오 야 골

「큰골」남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오야골」이라고 부른다. 마을에 옛날에는 자두나무(오야나무)가 많았다 해서 「오야골」이라고 부른다 한다. 옛날 기와를 구어 기왓골(瓦洞)이 오야골로 변한 것이다.

굿 고 개

「큰골」북서(北西)쪽으로 고개가 있는데 이 고개를 「꽃고개」라고 부른다. 꽃이 많이 피는 고개라 「꽃고개」라고 부르며 그 고개아래에 있는 마을도 고개 지명따라 「꽃고개」라고 부른다. 화현(花峴), 화현리(花峴里)라고도 부르는 마을인데 이조중종 기묘사화이후 한양조씨가 낙향하여 마을을 이루고 매화골(梅花꼴)이 변하여 꽃고개가 되고 굿고개로 음이 바뀌었다. 黃五顯(황오현) 先生의 고택(古宅)이 있는 곳이다.

점 말

「큰골」남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점말」이라고 부른다. 점촌(店村)이라고도 하는데 옛날에 큰 옹기점이 있어서 전국에서 상인들이 몰려들었던 마을이다. 굿고개에 붙은 마을이다.

고 루 골

「큰골」남(南)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고릿골」이라고 부른다. 또한 괴동(槐洞)이라고도 부르는데 마을에 큰 느티나무가 있다해서 「괴동」,「고릿골」이라고 부른다. 옛날에 한노승(老僧)이 마을을 지나가다가 12그루를 심었는데 한그루가 크게 남았다 한다. 수령이 500년 되는 느티나무를 마을사람은 마을을 지켜주는 나무라 해서 매년 음력으로 정월 보름날 제사를 지낸다.

舟 岩(주암)

「굿고개」남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주암」이라고 부른다. 옛날에 여기까지 배가 들어와서 배를 매었다는 마을이라 주암(舟岩)이라고 부른다.

절 텃 골

「와곡」동남(東南)쪽으로 골짜기가 있는데 이 골짜기를 「절텃골」이라고 부른다. 전에 절이 있었던 골짜기라 「절텃골」이라고 부른다.

옻 샘

「안터」남쪽으로 샘이 있는데 이 샘을 「옻샘」이라고 부른다. 물이 매우 차서 옻오른데 좋다는 샘이라 이 샘을 「옻샘」이라고 부른다.

안 터

큰골과 굿고개 사이에 「안터」라는 조그마한 마을이 있다. 안기(安基), 내기(內基)라고 기록하고 둘레가 산으로 쌓여있고 이토정선생이 지나다가 안터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유래다. 진사 조일원(趙一元)선생이 사시던 곳으로 한말에 많은 공적과 교육을 하신 곳이다. 조일원씨는 최면암(崔勉庵)선생과 더불어 국사를 의논하고 김복한(보령오열사의한분)과 같이 우국충정(憂國忠情)을 논한 범바위(虎岩)가 뚜렷하게 남아있다.


소 정 이

「큰골」 서북(西北)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소정이」,「소정」이라고 부른다. 옛날에 소나무 정자가 있었다 해서 「소정이」,「소정」이라고 부른다.

살포쟁이

「큰골」서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살포쟁이」라고 부른다. 옛날에 논을 살피고 다닐때는 살포를 들고 다녔었다. 하루는 살포를 들고 논을 살피고 있는데 갑자기 연못 주변에서 물이 하늘로 올라가려는 소리와 함게 이무기가 나타나서 논을 살피고 있는 열명 가량의 노인(老人)들을 잡아 먹으려고 하므로 살포를 들고 노인들이 이무기와 싸워 마침 이무기를 죽이려 하는데 한쪽에서 한 도승(道僧)이 나타나서 그 뱀을 살려주라고 하므로 돌아서는데 잠깐사이에 도승과 이무기가 어디론가 없어졌다 한다. 살포를 들고 다니는 농부(農夫)가 많은 곳이라 「살포쟁이」라고 부른다.

동대동(東垈洞)

백제(百濟)때는 신촌현(新村縣)에 속했었다. 신라(新羅)때는 신읍현(新邑縣)에 속했으며 고려(高麗)때는 보령현(保寧縣)에 속했었다. 조선(朝鮮)때에도 보령군(保寧郡)에 속했으며 이조말엽(李朝末葉)엔 보령군(保寧郡) 우라면(于羅面)의 지역(地域)인데 「한내」동쪽이 되므로 동대(東垈)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行政區域) 개혁(改革)때 평신리(平薪里) 사랑동(寺郞洞)과 목충면(睦忠面)의 목장리(木場里)를 병합하여 동대리(東臺里)라 해서 대천면(大川面)에 편입(編入)되었다가 후에 대천읍(大川邑)에 편입되었고. `1986년1월 1일 법률 제3798호로 대천읍이 대천시로 승격되어 대천시에 편입되었다가, 이후`99 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로 개명된후 보령시에 편입되었음.

나무장터

「오랏이」서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나무장터」,「목장(木場)」「목장리(木場里)」라고 부른다. 옛부터 「나무장터」로 유명하며 그래서 「나무장터」,「목장(木場)」이라고 부른다. 대천읍(大川邑) 새장터와 속하여졌고 하천(河川)은 새로 생긴 것이며 지금은 지목상(地目上)으로나 구분될뿐 신시와 목장을 구분하기 어렵다.

平薪(평신)

「오랏이」북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평신(平薪)」,「평섬」이라고 부른다. 섬이 많이 있었다해서 평신(平薪), 평섬이라고 부른다. 심상철(沈相喆)선생께서 제자를 지도하시던 곳이다.

선황당이

「오랏이」와 평신「平薪」사이에 「서낭당(城徨堂)」이 있다. 삼거리에 팽나무가 하나 서있는데 오고가는 사람들이 돌을 던져서 돌이 오붓이 쌓여있다. 이 나무를 「서낭댕이」이라 부르는데 행인이나 마을사람들이 운을 점치는 나무라 하여 「서낭당이」라고 부른다.

두 러 미

「오랏이」북쪽으로 둥근 산아래에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두러마」,「두루미」,「원산(圓山)」이라고 부른다. 산모양이 둥글고 들가운데 있어 둥근산이 변하여 두러미가 되었다. 성주산의 용이 구슬을 놓았다는 전설이 있어 명산을 많이 드나들고 한양조씨의 선산들이 있다.

망해암(望海庵)터

「오랏이」 동남(東南)쪽 성주산(聖住山) 왕자봉(王字奉)남쪽 능선(陵線)에 망해암(望海庵)의 터가 있다. 이곳에선 황해(黃海)가 바라다 보인다.

바래기재

평신(平薪) 동남(東南)쪽 성주산(聖住山)줄기에 고개가 있는데 이 고개를 「바래기재」라고 부른다. 남포(藍浦)에서 부여(扶餘)로 통하는 큰 길이 되는 고개다. 높은 고개라 망티(望峠)라고도 부른다.

오 랏 이

「질퍼니」 남(南)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오랏이」라고 부른다. 동대리(東垈里)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조선(朝鮮)때 우라면(于羅面)사무소(事務所)가 있었던 마을이다. 「우라(于羅)」라고 부르기도 한다.

신설동(셋집매)

대천천(大川川) 건너에 새로운 마을이 형성되었는데 전에는 세집매라고 해서 수호(數戶)에 불과하던 마을이 급격히 늘어 백여대촌(百餘大村)을 이루고 있다.

질 퍼 니

「오랏이」북(北)쪽에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질퍼니」라고 부른다. 질고 평평한 들에 마을이 있다해서 「질퍼니」라고 부른다.

열두칸다리

세조(世祖) 4年에 한내엔 돌로 열두개를 만들어 그것으로 놓은 다리가 있었는데 이 다리를 열두칸 다리라고 불렀다. 전라도(全羅道)와 충청도(忠淸道) 남쪽에서 한양(漢陽)으로는 가는 행인(行人)들이 「한내」를 건널때에 많은 고충을 받으므로 돌로 길이 1m, 세로 4m, 두께 50m의 규격으로 만들어 다리를 놓았었다. 세조가 죽은후 관리가 소홀해지면서 차츰 부서져 갔는데 지금 다리를 놓았던 돌은 1977년 대천읍 사무소(大川邑 事務所)에서 건져다가 보관하고 있으며 그중 1묘(墓)는 오천면 승보리 천주교인(鰲川面 承保里 天主敎人) 순교비로 세워져 있어 뜻이 있다.

명천동(鳴川洞)

백제(百濟)때는 신촌현(新村縣)에 속했었다. 신라(新羅)때는 신읍현(新邑縣)에 속했으며 고려(高麗)때는 보령현(保寧縣)에 속했었다. 조선(朝鮮)때에도 보령현(保寧縣)에 속했으며 이조말엽(李朝末葉)엔 보령군(保寧郡) 우라면(于羅面)의 지역(地域)인데 1914년 행정구역(行政區域) 개혁(改革)때 어전리(於田里), 명암리(鳴岩里), 송정리(松亭里), 이천리(伊川里), 흥동(興洞)일부를 병합하여 명암(鳴岩)과 이천(伊川)의 이름을 따서 명천리(鳴川里)라 하여 대천면(大川面)에 편입(編入)되었다가 후에 대천읍(大川邑)에 편입되었고. `1986년1월 1일 법률 제3798호로 대천읍이 대천시로 승격되어 대천시에 편입되었다가, 이후`99 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로 개명된후 보령시 대천4동에 편입되었음.

명 암(鳴岩)

평섶(平薪) 동쪽에 있는 마을로써 성주산의 정기를 받은 마을을 이루고 있다. 이조말의 한학자 안기정(安起亭)선생의 교육도장으로 교육을 일으킨 곳이다. 뒤에 와우형(臥牛形)이라고 하였다. 한내여중에 이르는 도로의 남쪽에 있다. 명암(鳴岩), 이천(伊川)을 합쳐 명천리를 이루었다.

명천폭포(鳴川瀑布)

성주산(聖住山) 기슭 이천(伊川)마을 근처에 폭포(瀑布)가 있는데 이 폭포를 명천폭포(鳴川瀑布)라고 부른다. 물이 바위에서 떨어지는 광경(光景)은 절경(絶景)을 이루는데 또한 물이 맑아 깨끗함을 말로 표현할수 없다라는 절찬이 있는 폭포(瀑布)다. 폭포근처는 시원하고 소나무가 우거져서 또한 많은 산새들이 울어대니 그 풍경 어찌 글로 표현하랴라는 한 시인(詩人)의 시구(詩句)도 있다. 물이 맑아서 잔병이 있는 사람이 이 물로 목욕(沐浴)을 하면 몸이 완쾌해진다 하며 옛날에는 선인(仙人)들이 찾아와서 놀다가기도 하던 폭포(瀑布)라 한다. 이 근처에 고란초가 자생(自生)하고 있다.

송정(松 亭)

「흥골」남동(南東)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송정(松亭)」,「소정이」라고 부른다. 옛날부터 울창한 소나무와 철죽꽃으로 유명한 마을이다. 소나무 정자(亭子)가 있었다 해서 「송정(松亭)」,「소정이」또는「송정리(松亭里)」라고 부른다.

으 름 내

「흥골」동남(東南)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으름내」,「이천(伊川)」이라고 부른다. 마을 한 가운데에 내가 있어서 조선(朝鮮)때는 보령현(保寧縣)과 남포현(藍浦縣)의 경계(境界)이기도 했었다. 지금으로부터 700여대(餘年) 전부터 집마다 으름나무가 많아서 「으름내」라고 불렀다 한다. 지금도 집집마다 으름나무가 많은 마을이다.

맷독거리

지금의 명천리(鳴川里) 「덕수연탄공장」자리에 맷돌방아간이 있었는데 여기를 「맷독거리」라고 부른다. 백제(百濟)때부터 맷돌방아간이 있어서 성주산(聖住山)근처에 있는 승려 3,000여명이 시주받아 온 곡식을 여기에서 배앗겼다 한다. 맷돌방아간이 있었다 해서 「맷독거리」라고 불렀다.

울 바 위

「흥골」동쪽으로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를 「울바위」라고 부른다. 바위에 굴이 있는데 굴속에 소리를 지르면 소리가 도로 울려나오는 바위라 부른다. 「울바위」아랫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은 마을에 「울바위」가 있다해서 「울바위」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어 전(於田)

「흥동(興洞)」동(東)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어전(於田)이라고 부른다. 마을에 밭이 많다해서 「어전(於田)」,「어전리(於田里)」,「어늘」또는「느랏」이라고 부른다.

수청거리

「흥동(興洞)」서북(西北)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수청거리」라고 부른다. 옛날엔 마을 가운데에 옹달샘이 있었는데 비가 개이면 무지개가 서곤하였다 한다. 물이 맑은 샘이 있어서 무지개가 서는 샘이 있다하여 「수청(水淸)거리」라고 부른다 한다. 지금은 그 옹달샘이 없어졌다.

절 골

명암 북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절골」이라고 부른다. 옛날부터 절이 있었다해서 「절골」이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청룡(靑 龍) 골

「으름내」동남(東南)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청룡(靑龍)골」이라고 부른다. 옛날엔 숲이 우거져서 청룡(靑龍)이 살다가 승천(昇天)한 마을이라 「청룡골」이라고 부른다.

흥 곡

「울바위」서(西)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흥골」이라고 부른다. 「흥동(興洞)」,「흥곡(興谷)」이라고도 부르는 마을인데 항시 마을이 흥해가야 한다해서 「흥골」,「흥동」,「흥곡」이라고 부른다.

궁촌동(宮村洞)

백제(百濟)때는 신촌현(新村縣)에 속했었다. 신라(新羅)때는 신읍현(新邑縣)에 속했으며 고려(高麗)때는 보령현(保寧縣)에 속했었다. 조선(朝鮮)때에도 보령현(保寧縣)에 속했으며 이조말엽(李朝末葉)엔 보령군(保寧郡) 우라면(于羅面)의 지역(地域)으로서 궁들(굼들)가운데 이룩된 마을임으로 「궁마을」또는 「궁말」,「궁촌(宮村)」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行政區域) 개혁(改革)때 흥동(興洞)일부를 병합하여 「궁촌리(宮村里)」라 해서 대천면에(大川面)에 편입(編入)되었다가 1962년 11월 21일에 대천읍(大川邑) 승격(昇格)에 따라 대천읍(大川邑) 궁촌리(宮村里)가 되었다. `1986년1월 1일 법률 제3798호로 대천읍이 대천시로 승격되어 대천시에 편입되었다가, 이후`99 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로 개명된후 보령시 대천4동에 편입되었음.

궁 말

이조중엽(李朝中葉)에 부마였던 심씨(沈氏)가 살았는데 집터는 이지암(土亭)이 잡아줬다 한다. 궁중(宮中)에서 땅을 거느린 마을이라 「궁말」,「궁촌(宮村)」이라고 불렀다 한다. 「궁들」에 있는 마을이다.

궁 들

「궁촌(宮村)」둘레에 있는 들을 「궁들」이라고 부른다. 나라에서 다스리는 들이란 뜻인데 왕족(王族)이 사는 들이라 「궁들」이다.

내항동(內項洞)

백제(百濟)때는 신촌현(新村縣)에 속했었다. 신라(新羅)때는 신읍현(新邑縣)에 속했으며 고려(高麗)때는 보령현(保寧縣)에 속했었다. 조선(朝鮮)때에도 보령현(保寧縣)에 속했으며 이조말엽(李朝末葉)엔 보령군(保寧郡) 우라면(于羅面)의 지역(地域)인데 1914년 행정구역(行政區域) 개혁(改革)때에 「내송리(內松里)」「장항리(獐項里)」와「외송리(外松里)」,「궁촌(宮村)」의 각일부를 병합하여 「내송(內松)」과「장항(獐項)」의 이름을 따서「내항리(內項里)」라 하여 대천면(大川面)에 편입(編入)되었다가 후1962년 11월 21일에 대천읍(大川邑)이 읍(邑)에 승격됨에 따라 大川邑 內項里가 되었다.`1986년1월 1일 법률 제3798호로 대천읍이 대천시로 승격되어 대천시에 편입되었다가, `98년10월 28일 보령시 조례 제322호에 의거 행정동명 중 "왕대동"을 "현포동"으로 통합하여 현포동으로 편입되었고,이후`99 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로 개명된후 보령시 대천5동에 편입되었음

왕대사(王臺寺)

「내송(內松)」북서(北西)쪽으로 왕대산(王臺山) 북쪽 중턱에 자리한 절을 「왕대사(王臺寺)」라고 부른다. 지금으로부터 30여년(餘年)전에 지은 절이다.

왕대산(王臺山)

대천읍(大川邑) 「남곡리(藍谷里)」와「내항리(內項里)」경계(境界)에 있는 산(山)을 「왕대산(王臺山)」이라고 부른다. 삼면이 바다로 접해있으며 산(山) 높이가 139m되는 바위산이 있는데 신라(新羅)의 마지막 왕(王) 경순왕(敬順王)이 이곳에서 놀았다 한다. 왕이 놀던 바위를 「왕대(王臺)」라 하는데 왕(王)이 놀다간 산(山)이라 「왕대산(王臺山)」이라고 부른다.

노루목이

「밧소래」 동(東)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노루목이」,「장항(獐項)」,「장항리」,「녹문(鹿門)」이라고 부른다. 마을 지형(地形)이 노루의 목처럼 생겼다해서 「노루목이」라고 부르는데 마을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오며 뒷산이 올창하여 노루가 많이 살았던 마을이다.

내 송

「소래」안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내송(內松)」,「안소래」라고 부른다.「소래」마을 안쪽에 자리해 있다해서「내송」,「안소래」라 부른다. 이곳에 군수 이상락이 살았으며 대천간척지를 개간하여 큰 공로를 세웠다.

밧소래

「소래」마을 바깥쪽으로 자리한 마을을 「밧소래」라고 부른다. 「소래」마을 바깥쪽으로 마을이 있다해서 「밧소래」라고 부른다. 또한 「장성이」라고도 부르는데 옛날에 장승이 서있어서 「장승이」라 부르다가 변해서 「장성이」라고 부른다.

소 래

「안소래」바깥쪽에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소래」라고 부른다. 내항리(內項里)에서 으뜸되는 마을이다. 마을 지형(地形)이 소라처럼 생겼다 해서 「소라」라 부르면 마을인데 변하여 「소래」라고 부른다.

절 샘

「왕대산(王臺山)」에 있는 「왕대사(王臺寺)」뒤로 샘이 있는데 이 샘을 「절샘」이라고 부른다. 바위밑에서 물이 나오는 샘이다. 절 근처에 샘이 있다해서 「절샘」이라고 부른다.

남곡동(藍谷洞 )

백제(百濟)때는 신촌현(新村縣)에 속했었다. 신라(新羅)때는 신읍현(新邑縣)에 속했으며 고려(高麗)때는 보령현(保寧縣)에 속했었다. 조선(朝鮮)때에도 보령현(保寧縣)에 속했으며 조선말엽(朝鮮末葉)엔 보령군(保寧郡) 우라면(于羅面)의 지역(地域)으로써 「족실」,「쪽실」또는 「남곡(藍谷)」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行政區域) 개혁(改革)때 탑동(塔洞), 대동(大洞), 요동(蓼洞), 외송리(外松里)의 각일부(各一部)를 병합하여 「남곡리(藍谷里)」라 해서 대천면(大川面)에 편입되었다가 1962년 11월 21일 읍(邑) 승격(昇格)에 따라 대천읍(大川邑)에 속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마제석(磨製石)이 발견(發見)되어 상고시대(上古時代)부터 부족(部族)이 있는 듯 하다. `1986년1월 1일 법률 제3798호로 대천읍이 대천시로 승격되어 대천시에 편입되었다가, 이후`99년 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로 개명된후 보령시 대천5동에 편입되었음

탑동(塔 洞)

「황골」북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탑동(塔洞)」이라고 부른다. 「탑골」이라고도 부르는 이 마을인데 옛날에 마을에 탑(塔)이 서있다해서 「탑동(塔洞)」,「탑골」이라고 부른다. 구전(口傳)에 따르면 옛날 한 노승(老僧)이 이곳에 절을 세우기 위하여 절터를 잡고 절을 세우면서 탑(塔)을 세웠는데 절을 짓던중 병에 걸려 죽었다 한다. 그래서 탑(塔)만 남았었는데 일제(日帝)때는 왜인(倭人)들이 탑(塔)을 일본(日本)으로 반출해 가기위해 군산항(群山港)까지 끌고가서 배에 싣고 일본으로 건너가던중 배가 파선되어 바다에 빠져버렸다 한다.

황 골

「족실」동남(東南)쪽 큰 골짜기에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황골」이라고 부른다. 옛날엔 마을에 큰 가뭄이 들어 마을사람들이 나무뿌리나 나물로 연명했었다 한다. 그때 마을이나 마을사람들이 누렇게 떠있었다 한다.그래서 「황골」이라고 부르는데 마을이 크다해서 「대동(大洞)」이라고도 부른다. 「황골」위쪽으로 자리한 마을은 「위황골」또는「동란곡(東蘭谷)」이라고 부르며 「황골」아랫쪽에 자리한 마을은 「아래황골」또는「서란곡(西蘭谷)」이라고 부른다.

쌍소나무

「탑골」동(東)쪽으로 길가에 서있는 소나무를 「쌍소나무」또는 「내외송(內外松)이」라고 부른다. 소나무 두 그루가 쌍으로 서있는 소나무다. 지금으로부터 약250년전에 아들을 얻지못한 한 중년부부가 성황당(城徨堂)을 위했는데 어느해에 그들이 위하는 성황당(城徨堂)에 소나무가 솟아나기 시작했다 한다. 그 소나무가 지금의 「쌍소나무」라 한다.

갱변말

「탑골」북동쪽 냇가에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갱변말」이라고 부른다. 냇가에 마을이 있다해서 「갱변말」,「강변」이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가포(佳浦)말

「족실」동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가포(佳浦)말」이라고 부른다. 「가포(佳浦)」라고도 부르는데 물가에 있는 마을이다. 「가포(佳浦)」라 부른다.

여수목

「가포말」동(東)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여수목」이라고 부른다. 「여수동」이라고도 부르는 마을인데 옛날엔 여우(女孤)가 많았다 해서 「여수목」,「여수울」이라고 부른다.

요암동(寥庵洞)

백제(百濟)때는 신촌현(新村縣)에 속했었다. 신라(新羅)때는 신읍현(新邑縣)에 속했으며 고려(高麗)때는 보령현(保寧縣)에 속했었다. 조선(朝鮮)때에도 보령현(保寧縣)에 속했으며 이조말엽(李朝末葉)엔 보령군(保寧郡) 우라면(于羅面)의 지역(地域)인데 1914년 행정구역(行政區域) 개혁(改革)때 금암리(金庵里)와 신대리(新垈里), 사동(寺洞), 요동(寥洞), 대동(大洞)의 각일부(各一部)와 남포군(藍浦郡) 북내면(北內面)의 후동(後洞)을 병합하여 요동(寥洞)과 금암(金庵)의 이름을 따서 「요암리(寥庵里)」라 하여 대천면(大川面)에 편입(編入)되었다가 대천읍(大川邑)에 편입되었다.`1986년1월 1일 법률 제3798호로 대천읍이 대천시로 승격되어 대천시에 편입되었다가, 이후`99 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로 개명된후 보령시 대천5동에 편입되었음

절터골

「절골」동(東)쪽에 있는 골짜기를 「절터골」이라고 부른다. 옛날 절이 있었던 터가 있어서 「절터골」이라고 부른다.

절 골

「윗윳골」서(西)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절골」이라고 부른다. 절이 있었던 마을이라 「절골」이라고 부른다.

윳 골

「금앗」서북(西北)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윳골」이라고 부른다. 여귀가 많은 마을이라 「윳골」이라고 부르며 또한 「요곡」,「요곡리」라고도 부른다. 「윳골」위쪽으로 자리한 마을은 「위욧골」이라 부르고 「욧골」아래에도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은 「아래욧골」이라고 부른다.

뒷 골

「금앗」남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뒷골」이라고 부른다. 「후동(後洞)」이라고도 부르는데 「남포면(藍浦面)」,「삼현리(三賢里)」,「삼줄」마을의 뒤에 있는 마을이다.

나분바위

「아랫윳골」서쪽으로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를 「나분바위」라고 부른다. 넓직한 면에 오줌을 눈것처럼 된 자국이 있는데 옛날에 장수가 눈 오줌자국이라 한다. 넓은 바위가 「나분바위」라 변해서 부른다.

금 앗

「윳골」남동(南東)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금앗」이라고 부른다. 「금암」,「금전」,「금암리」라고도 부른다.「금앗」앞에 있는 들은 「금아시」,「금암평」이라고 부른다.

신흑동(新黑洞)

백제(百濟)때는 신촌현(新村縣)에 속했었다. 신라(新羅)때는 신읍현(新邑縣)에 속했으며 고려(高麗)때는 보령현(保寧縣)에 속했었다. 조선(朝鮮)때에도 보령현(保寧縣)에 속했으며 이조말엽(李朝末葉)엔 보령군(保寧郡) 우라면(于羅面)의 지역(地域)인데 1914년 행정구역(行政區域) 개혁(改革)에 따라 고잠리(高岑里),군입리(軍入里),흑포리(黑浦里),신대리(新垈里),사동(寺洞)의 각일부를 병합하여 신대(新垈)와 흑포(黑浦)의 이름을 따서 「신흑리(新黑里)」라하여 대천면(大川面)에 편입(編入)되었다가 후에 대천읍(大川邑)에 편입되었다. 담양 전씨대가(潭陽 田氏大家)마을이다. `1986년1월 1일 법률 제3798호로 대천읍이 대천시로 승격되어 대천시에 편입되었다가, 이후`99년 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로 개명된후 보령시 대천5동에 편입되었음

갓바위

「흑포」남쪽으로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를 「갓바위」라고 부른다. 바위가 갓처럼 생겼는데 고려(高麗)말엽(末葉) 오랑캐의 침범이 잦을 때 김성우(金成雨) 장군이 여기를 지키며 갓을 걸어 놓았던 바위라 한다. 그후「갓바위」라고 부르게 되었따 한다.

거먹개

「고잠」동(동)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거먹개」라고 부른다. 「거막포」,「거벅개」,「흑포」,「흑포리」라고도 부르는데 마을앞에 개가 있다해서 그리부른다.

고 잠(高岑)

「군두리」동남(東南)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고잠(高岑)」이라고 부른다. 마을 뒤에 높은 고개가 있따해서 「고잠(高岑)」,「고령(高嶺)」,「고잠리(高岑里)」라고 부른다.

다보도(多寶島)

대천해수욕장 맞은편에 있는 바위로 된 섬을 「다보도(多寶島)」라고 부른다. 섬가장자리에 흰 자갈이 깔려있어 깨끗하며 조용한 유원지다. 흰 자갈에 수정(水晶)이 박혀있는 섬이다.

군입리(軍入里)

「고잠(高岑)」서북(西北)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군입리(軍入里)」라고 부른다. 「군입」,「군두리」라고도 부르는데 고려(高麗)때 김성우(金成雨)장군(將軍)이 내포(內浦)에 침입한 왜병(倭兵)을 치기위해 군사를 이끌고 이곳으로 들어와서 왜병을 섬멸하였다. 군사가 들어와서 적을 무찌른 마을이라 「군입리(軍入里)」,「군두리」,「군두」라고 부른다.

군마루

「거막포」동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군마루」라고 부른다. 또한 「군헌(軍軒)」이라고도 부르는데 백제(百濟)때에 말엽(末葉)에 당(唐)나라 군사가 쳐들어 올 때 당나라 군사들이 큰 배에서 군사들을 작은 배로 옮겨싣고 와선 이 곳에 풀었으나 잠복하고 있던 백제군사들이 모조리 섬멸하였다 한다. 그후 백제군사들이 주둔해 있었다 해서 「군마루」,「군헌(軍軒)」이라고 부르고 풍류객 전학진 선생이 사시던 곳이다.

다슬기

대천해수욕장(大川海水浴場) 서(西)쪽 바다가운데 있는 섬을 「다슬기」라고 부른다. 밤이 되면 물새들이 잠자리를 찾아 많이 깃드는 섬이다.

대천어항(大川漁港)

「군두리」서쪽으로 항구가 있는데 이 항구(港口)를 「대천어항(大川漁港)」이라고 부른다. 1934年에 어항으로 개발한 항구다.

大川海水浴場(대천해수욕장)

「군두리」서남(西南)쪽에 있는 긴 모래톱을 대천해수욕장(大川海水浴場)이라고 부른다.

사구매벌

「신흑리(新黑里)」에서 「남포면(藍浦面)」삼현리(三賢里)까지 뻗쳐있는 바닷가의 모래톱을 「사구매벌」이라고 부른다. 긴 모래톱으로 어디나 해수욕장이 가능한 절경인 모래톱이다.

상주막(常住幕)

「고잠(高岑)」북쪽에 있는 고개를 「상주막(常住幕)」이라고 부른다. 고려말엽(高麗末葉)에 김성우(金成雨)장군이 이곳에 군사를 주둔시켰다 하는 마을로 「상주막(常住幕)」이라고 부른다.

서낭댕이

「송현당고개」서남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서낭댕이」라고 부른다. 옛날부터 서낭당이 있다해서 「서낭댕이」라고 부른다.

석수(石水)골

「거막개」서쪽으로 자리한 마을을 「석수동(石水洞)」이라고 부른다. 돌사이에서 물이 나오는데 맑은 물로서 약수로도 통하는 물이다. 돌에서 물이 나오는 마을이라 「석수동(石水洞)「이라고 부른다.

송현산

「군두리」북쪽으로 산이 있는데 이 산을 「송현산」이라고 부른다. 소나무가 무성한 산으로서 마을을 지키는 산으로 불러진다. 옛날에는 산에 제당을 만들어 놓고 위했던 산이다.

옻 샘

「해망산(海望山)」서쪽 기슭에 있는 샘을 「옻샘」이라고 부른다. 물이 몹시 차서 옻 오른데 목욕(沐浴)을 하면 신호하다고 한다.

할미바위

「거먹개」서쪽 길가에 있는 바위를 「할미바위」라고 부른다. 바위에 손처럼 생긴 자국이 있는 갱기할미가 뛰어 내리느라고 짚은 것이라 한다. 「노고함」이라고도 부른다.

해망산(海望山)

「고새울」동북(東北)쪽에 있는 산을 「해망산(海望山)」이라고 부른다. 오랑캐들이 수시로 백성을 괴롭히기 위해 서해(西海)를 침범해 옴으로 이 산에 군사를 배치하고 망보게 한 산이다. 바다가 멀리까지 훤히 바라다 보이는 산이라 「해망산(海望山)」이라고 부른다.

황전들

「거먹개」동쪽에 자리한 들을 「황전들」이라고 부른다. 갯벌을 막아서 들을 만들었다는 들이다.

달포말

「신흑리(新黑里)」에 있는 마을이다. 바닷가에 자리한 마을인데 달빛이 바닷물에 반사되어 마을을 훤하게 하는 마을이라 「달포말」이라고 부른다.

김서방골

「신흑리(新黑里)」바닷가에 자리한 마을이다. 옛날에 배가 파선되어 강변에 떠밀려 왔는데 대추를 싣고가던 배였다 한다. 그 대추가 이 곳에서 대추나무로 자랐으며 또한 그 배에서 나무조각으로 된 호패가 「김(金)」자가 써있었다 한다. 그래서 「김서방골」이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호대골

「신흑리(新黑里)」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에 유씨(柳氏)가문의 한사람이 정착하면서 호도(胡桃)와 대추를 심었다 한다. 그래서 마을에 큰 호도밭과 대추밭이 생겨서 「호대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지금도 유씨들이 20여호가 사는 마을이다.

당 제(堂祭)

「신흑리」에서는 당제(堂祭)를 지내는데 큰 당제에서는 소를 잡고 작은 당제에서는 돼지를 잡아서 제물로 올린다. 당제(堂祭)를 지내는 제식(祭式)은 다른곳과 같다. 큰 당과 작은 당에서 당제(堂祭)를 지낸다.

수신제(水神祭)

대천해수욕장(大川海水浴場)이 개장한 매년 7월1일을 기하여 관내 주민들이 용왕신(龍王神)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이 제사를 수신제(水神祭)라고 부른다.

출항제

고기잡이 나가는 배가 출항할때는 만선을 비는 제사를 지내는데 이 제사를 출항제라고 부른다. 풍악을 울리며 용왕(龍王)에게 지내는 제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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