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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의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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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의 문화 글의 상세내용
제목 남포면
구분 지명유래
내용

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부터 인류(人類)가 정착(定着)하기 시작한 곳으로써 마한(馬韓)때는 만로국(蠻虜國)이라는 부락사회국가(部落社會國家)가 있었다.

백제(百濟)때는 사포현(寺浦縣)에 속했으며 신라(新羅)때는 소포현(蘇浦縣)에 속해서 서림군(西林郡)의 영현(領현)이였고, 고려(高麗)때는 남포현(藍浦縣)이라고 고쳐서 불렀었다. 고려(高麗) 32대 우왕때에 왜구의 침입(侵入)으로 읍성(邑城)을 비롯하여 주변(周邊)이 황폐화하여 초토화(焦土化) 해버리는 고을이 되어 버렸었다. 공양왕(恭讓王) 2년 에 남포진(藍浦鎭)이 정착함에 따라 군사가 주둔하고 유망인(流亡人) 들을 불러들임으로써 다시 재건(再建)하는 현(縣)으로 귀모를 갖게된다. 조선태조(朝鮮太祖) 6년엔 병마사(兵馬使)가 자리하면서 토성(土城)이였던 읍성(邑城)을 헐고 석축(石築)으로 남포읍성(藍浦邑城)을 구축하며 朝鮮(조선) 世祖(세조) 12년(1466)에 남포진(藍浦鎭)을 혁파하고 남포현(藍浦縣)을 두게된다. 그 후 조선(朝鮮) 세조(世祖) 12년(1446)에 남포진(藍浦鎭)을 혁파하고 남포현(藍浦縣)을 두게된다. 그후 조선(朝鮮) 제26대 고종(高宗) 32년(1895)에 지방행정(地方行政) 개정(改政)에 따라 남포군청(藍浦郡廳)의 소재지로써 군내면(郡內面)외 팔개면(8個面)을 관할하는 소재지로서 군내면(郡內面)이 되어 교촌(郊村)외 9개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行政區域) 개혁(改革)때 신안면(新安面)의 영전(令田)외 17개리(個里)와 북내면(北內面)의 16개리(個里)와 보령군(保寧郡) 우라면(于羅面)의 금암리(金庵里)일부를 병합하여 남포면(藍浦面)이라하고, 달산(達山), 봉덕(鳳德), 삼현(三賢), 소송(巢松), 신흥(新興), 양기(陽基), 양향(梁項), 옥동(玉東), 옥서(玉西), 월전(月田), 읍내(邑內), 제석(帝釋), 창동(倉洞)외 13 個里를 관할하여 보령군에 편입되었다. `95.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 남포면이 되었다.



마한(馬韓)때는 부락사회국가(部落社會國家)인 만로국(萬盧國)이 있었다.백제(百濟)때는 사포현(寺浦縣)에 속했으며 신라(新羅)때는 소포현(蘇浦縣)에 속했었다. 고려(高麗)때는 남포현(藍浦縣)에 속했으며 조선(朝鮮)때에도 남포현(藍浦縣)에 속했었다. 조선말엽(朝鮮末葉)엔 남포군(藍浦郡) 군내면(郡內面)의 지역(地域)으로서 남포군청(藍浦郡廳)이 있으므로 읍내리(邑內里)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行政區域) 개혁(改革)때 중리(中里)와 동리(東里) 남리(南里), 서리(西里)의 각(各) 일부를 병합하여 읍내리(邑內里)라 해서 보령군(保寧郡) 남포면(藍浦面)에 편입(編入)되었다. `95.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 남포면이 되었다.

절 터 골

동리(東里) 동(東)쪽에 있는 골짜기를 「절터골」이라고 부른다. 옛날에 절이 있었다해서 「절터골」이라고 부르는 골짜기이다.

장 승 배 기

중리(中里) 남(南)쪽, 동리(東里) 북(北)쪽, 남리(南里) 서(西)쪽에 있는길을 「장승배기」라고 부른다. 각기 장승이 박혀있다해서 「장승배기」라고 부르는 길이다.

성 안

읍내리(邑內里) 중심지(中心地)에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성안」이라고 부른다. 「중뜸」중리(中里)라고도 부르는데 읍성(邑城) 안쪽에 자리해 있어서 「성안」이라고 부른다.

성 바 끼

「중뜸」서(西)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성바끼」또는 「성밖」, 서문외리(西門外里), 서리(西里)라고 부른다. 남포읍성(藍浦邑城), 서문(西門) 바깥쪽에 자리한 마을이다.

부 엉 바 위

「새현」 남쪽으로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를 「부엉바위」라고 부른다. 옛날에 부엉이가 살던 바위라하여 「부엉바위」라고 부른다.

미 륵 터

읍내(邑內) 서쪽으로 옥서리(玉西里)의 옥서리저수지(玉西里貯水地)위에「미륵터」라고 부르는 터가 있다. 옛날에 미륵불(彌勒佛)이 서있었다해서 「미륵터」라고 부르는 터다.

말 재

읍내(邑內)에서 미산면(嵋山面)으로 넘어가는 큰고개를 「말재」마티(馬峠)라고 부른다. 옥마산(玉馬山)의 줄기에 고개가 있다해서 마티(馬峠)「말재」라고 부른다.

東 門(동문) 밖

「중뜸」 동(東)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東門(동문)밖」이라고 부른다. 남포읍성(藍浦邑城)의 동문(東門) 바깥쪽에 마을이 있다해서「東門(동문)밖」이라고 부르는데 동리(東里),「동밖」「동문의리」라고도 부르는 마을이다.

냇 가 말

「중뜸」남(南)쪽에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냇가말」이라고 부른다. 내의갓쪽으로 마을이 있어서「냇가말」이라고 부른는데 남포읍성(藍浦邑城)의 남문(南門)이 있었던곳이라 남리(南里) 「남문거리」라고도 부르는 마을이다.

藍 浦 場(남포장)

「중뜸」에 있는 시장거리를 남포장(藍浦場)이라고 부른다. 2일, 7일에 서는 장터다. 옛날에 큰 정자가 있어서「정자거리」라고도 부르는데 변해서「저자거리」라고 부른다.

개 굴 봉

「남문거리」 남(南)쪽에 있는 산을「개굴봉」이라고 부른다. 장사추와형(長蛇追蛙形)의 명당(名堂)이 있다는 터라「개굴봉」이라고 부르는 산이다.

가 마 바 위

「말재」남쪽에 있는 바위를「가마바위」라고 부른다. 바위모양이 가마처럼 생겼다해서「가마바위」라고 부른다.


玉 東 里(옥동리)

마한(馬韓)때는 만로국(萬盧國)에 속한 지역(地域)이었다. 백제(百濟) 때는 사포현(寺浦縣)에 속했으며 고려(高麗)때는 남포현(藍浦縣)에 속했었다. 조선(朝鮮)때에도 남포현(藍浦縣)에 속했으며 조선말엽(朝鮮末葉)엔 남포군(藍浦郡) 군내면(郡內面)의 지역(地域)인데, 1914年 행정구역(行政區域) 개혁(改革)에 따라 교촌(郊村) 동도리(東島里)와 동리(東里) 서리(西里)의 名一部(각일부)와 북내면(北內面)의 옹암리(甕岩里) 一部(일부)를 병합하여, 뒤에 있는 옥마산(玉馬山)과 동도(東島)의 이름을 따서 옥동리(玉東里)라하여 보령군(保寧郡) 남포면(南浦面)에 편입(編入)되었다. `95.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 남포면이 되었다.

여 단 집 터

「장터말」 북(北)쪽에「여단집터」라는 집터가 있다. 옛날 남포현(藍浦縣)의 여단(勵壇)이 있었던 자리라「여단집터」라고 부른다.

생 교 골

「동소개」동(東)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생교골」이라고 부른다.「향교골」교촌(郊村)이라고도 부른다. 남포향교(藍浦鄕校)가 있었던 마을이다.

부 처 샘

「생교말」동(東)쪽에 샘이 있는데 이 샘을「부처샘」이라고 부른다. 옛날에 샘근처에 부처가 있다. 해서「부처샘」이라고 부른다.

머 구 나 뭇 골

「생교골」동(東)쪽으로 골짜기가 있는데 이 골짜기를「머구나뭇골」이라고 부른다. 머구나무「오동나무」가 많은 골짜기라「머구나뭇골」이라고 부른다.

매 봉 재

「큰독골」남쪽에 산이 있는데 이 산을「매봉제」라고 부른다. 옛날에 매사냥을 하던 산이라「매봉재」라고 부르는 산이다.

둠 벙 이 고 랑 논

옥동리(玉東里) 북쪽으로「둠벙이고랑논」이란 논이 있다. 논에 둠벙이 있고 지대(地帶)가 깊어서 이 논을「둠벙이고랑논」이라고 부른다.

독 골

동조개(東鳥介) 북(北)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독골」이라고 부른다. 옹곡(甕谷)「옹곡리」라고도 부르는데 옛날에 독을 굽던곳에 마을이 생겼다. 해서 옛날부터「독골」이라고 부른다. 돌도 많은 마을이다.

동 조 개 (東 鳥 介)

옥동리(玉東里) 중앙(中央)에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동조개(東鳥介)라고 부른다.

장 터 말
옥동리(玉東里) 북(北)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장터말」이라고 부른다. 옛날에 시장(市場)이 있었던 마을이다.

큰 독 골

「독골」북쪽에 자리한 큰 마을을「큰독골」이라고 부르고「독골」의 남쪽에 자리한 작은 마을을「작은독골」이라고 부른다.

倉 洞 里(창동리)

마한(馬韓)때는 만로국(萬盧國)에 속했었다. 백제(百濟)때는 사포현(寺浦縣)에 속했으며 신라(新羅)때는 소포현(蘇浦縣)에 속했었다. 고려(高麗)때에는 남포현(藍浦縣)에 속했으며, 조선(朝鮮)때에도 남포현(藍浦縣)에 속했었다. 조선말엽(朝鮮末葉)엔 남포군(藍浦郡) 북내면(北內面)의 지역(地域)으로서 조선(朝鮮)때 남포현(藍浦縣)의 사창(社倉)이 있었으므로 「창골」또는 창동(倉洞)이라고 하였는데, 1914年 행정구역(行政區域) 개혁(改革)때 이천리(伊川里), 고이리(古也里)를 병합하여 창동리(倉洞里)라해서 보령군(保寧郡) 남포면(南浦面)에 편입(編入)하였다. `95.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 남포면이 되었다.

古 也 谷(고야곡)

창동(倉洞) 동남(東南)쪽 골짜기에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고야곡(古也谷)「고야실」이라고 부른다. 마을에 명당(名堂)자리가 많은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옛부터 피난곳으로도 알려진 마을이다. 또한 마을 동쪽으로 못이 있는데 3000평(坪)이 넘는 큰 못이다.

北 亭 子(북정자)

창동(倉洞) 서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북정자(北亭子)라고 부른다. 읍내리(邑內里)에선 북(北)쪽에 자리한 마을인데 옛날에 정자(亭子)가 있었다. 해서 북정자(北亭子)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元 倉(원창)

창동리(倉洞里)의 원 마을이다. 옛날엔 큰 마을이였으나 고려(高麗)때 오랑캐들의 침범이 잦았을 때부터 쇠퇴해간 마을이다. 백제(百濟) 신라(新羅)이전서부터 마을이 있었다. 사창(社倉)이 있는 창동(倉洞)의 원 마을이라 원창(元倉) 이라고 부른다.

龍 華 寺(용화사)

창동(倉洞) 동(東)쪽으로 옥마산(玉馬山) 서(西)쪽 기슭에 있는 절을 용화사(龍華寺)라고 부른다. 「윤창암」이라고도 부르는데 1929年 김윤창(金潤昌)이 세운 절이다.

으 릅 내

창동(倉洞) 북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마을을「으릅내」라고 부른다. 한가운데 내가 있는데 「어읍내」 이천(伊川)이라고도 부른다. 보령현(保寧縣)과 남포현(藍浦縣)의 경계(境界)가 되었던 내다.

倉 洞(창동)

「으릅내」 남(南)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창동(倉洞)이라고 부른다. 조선(朝鮮)때 사창(社倉)이 있었던 마을이라 창동(倉洞)「창골」이라고 부른다.

山 祭 堂(산제당)

용화사(龍華寺) 위쪽에 산제당(山祭堂)이 있다. 매년(每年) 음력으로 정초와 4月 8日에 산제(山祭)를 지내는 산제당(山祭堂)이다.

鳳 德 里(봉덕리)

마한(馬韓)때는 만로국(萬盧國)에 속한 지역(地域)이었다. 백제(百濟) 때는 사포현(司浦縣)에 속했으며 신라(新羅)때는 소포현(蘇浦縣)에 속했었다. 고려(高麗)때는 남포현(藍浦縣)에 속했으며 조선(朝鮮)때에도 남포현(藍浦縣)에 속했었다. 조선말엽(朝鮮末葉)엔 남포군(藍浦郡) 북내면(北內面)의 지역(地域)인데, 1914年 행정구역(行政區域) 개혁(改革)때 관동(冠洞), 대덕동(大德洞), 환리(環里)와 옹곡리(甕谷里), 봉산리(鳳山里), 창동(倉洞)의 각일부를 병합하여 봉산(鳳山)과 대덕(大德)의 이름을 따서 봉덕리(鳳德里)라하여 보령군(保寧郡) 남포면(藍浦面)에 편입(編入)되었다. `95.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 남포면이 되었다.

고 두 머 리

봉산(鳳山) 북동(北東)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고두머리」또는 환리(環里)라고 부른다. 마을 지형(地形)이 고리처럼 생겼다. 해서 환리(環里)라고 부르며, 「고리머리」라 부르다가 변하여 「고두머리」라고 부른다. 金義李氏(김의이씨)의 고택이 있고 마을 아래 下馬碑(하마비)가 있었으나 然由(연유)는 모르겠다.

화 덕

봉산(鳳山) 남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화덕」이라고 부른다. 옥동리(玉東里)의「독굴」아래쪽이 되므로「아래독굴」「하독굴」이라 하다가 변하여「화덕」이라 부른다. 남포역(藍浦驛)앞이 됨으로 역전(驛前)이라고도 부른다.

갓 골

봉산(鳳山) 동(東)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갓골」이라고 부른다. 동쪽으로 가(邊)에 있으므로 「갓골」이라고 부르는데 관동(冠洞)이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농 장

「갓골」서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농장」이라고 부른다. 일제시대(日帝時代) 일본인(日人) 야마모도(山本)라는 사람이 임야를 개간해서 농장을 만든 후부터 마을을「농장」이라고 부른다.「오야건너」라고 부를때도 있는 마을이다.

돌 모 랭 이

「대덕골」과 「고두머리」사이에 있는 모롱이를「돌모랭이」라고 부른다. 모롱이에 돌이 많이 있다 해서「돌모랭이」라고 부른다.

鳳 山(봉산)

「고두머리」남서(南西)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봉산(鳳山)이라고 부른다. 부엉이가 산다는 산높이 182m의 봉산(鳳山) 아래에 있는 마을이다. 산명(山名)따라 봉산(鳳山)이라고 부른다.

鳳 凰 寺(봉황사)

봉산(鳳山)뒤쪽으로 절이 있는데 이 절을 봉황사(鳳凰寺)라고 부른다. 해방 후에 이곳에 세워진 절이다.

알 뫼

봉산(鳳山)과 「갓골」사이에 있는 외딴 산을 「알뫼」라고 부른다. 산의 봉(峰)이 알(卵)처럼 생겼다 해서「알뫼」라고 부르는 산이다.

장 터 말

역전(驛前) 남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장터말」이라고 부른다. 옛날에 장이 섰었던 마을이라「장터말」이라고 부른다.

중 뫼

봉산(鳳山)과「대덕골」 사이에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중뫼」라고 부른다. 마을과 마을 사이에 자리한 마을이라「중뫼」라고 부른다.

대 덕 골

봉산(鳳山) 북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대덕골」 대덕동(大德洞)이라고 부른다. 옛날부터 큰 덕을 베푸는 사람이 많이 산 마을이라 한다.

山 祭 堂(산제당)

봉산(鳳山) 뒷쪽으로 옛날부터 산제(山祭)를 지내는 산제당(山祭堂)이 있다. 산제(山祭)는 마을의 잡귀를 몰아내기위한 제사라 그 해의 풍년을 비는 제사를 지내는 산제당(山祭堂)이다.

帝 釋 里(제석리)

마한(馬韓)때는 만로국(萬盧國)에 속했었다. 백제(百濟)때는 사포현(寺浦縣)에 속했으며 신라(新羅)때는 소포현(蘇浦縣)에 속했었다. 고려(高麗)때는 남포현(藍浦縣)에 속했으며 조선(朝鮮)때에도 남포현(藍浦縣)에 속했다가, 조선말엽(朝鮮末葉)에 남포군(藍浦郡) 북내면(北內面)의 지역(地域)으로서 신라(新羅)의 끝 임금 김부대왕(金傅大王) 경순왕(敬順王)의 사당(祠堂)이 있다가 옥마산(玉馬山)으로 옮겼으므로 「제적(帝釋)골」 또는 제석동(帝釋洞)이라 하였는데, 1914年 행정구역(行政區域) 개혁(改革)때 삼현리(三賢里) 一部(일부)를 병합하여 제석리(帝釋里)라 해서 보령군(保寧郡) 남포면(藍浦面)에 편입(編入)되었다. `95.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 남포면이 되었다.

元 帝(원제)

「제석골」의 원 마을이다. 옛날부터 마을이 있어서 이 곳의 원 마을이라 원제(元帝)라고 부른다.

新 坪(신평)

「제석골」 남쪽으로 들이 있는데 이 들을 신평(新平)이라고 부른다. 새로 개간한 들이라 신평(新平)이라고 부르는 들이다.

大 也 谷(대야곡)

신평(新平) 동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대야곡(大也谷)이라고 부른다. 「대야실」이라고도 부르는데 큰 산을 바라보고 자리한 마을이라 대야곡(大也谷)「대야실」이라고 부른다.

쇠 도 둑 골

신평(新平) 북쪽으로 굴이 있는데 이 굴을 「쇠도둑골」이라고 부른다. 옛날에 쇠도둑이 살았던 굴이라「쇠도둑골」이라고 부른다.

帝 釋 洞(제석동)

신평(新平)들 북(北)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제석동(帝釋洞)「제석굴」이라고 부른다. 신라(新羅)의 마지막 왕(王) 경순왕(敬順王)이 이곳에서 놀았다 하며 경순왕(敬順王)의 사당(祠堂)이 있는 마을이라 제석동(帝釋洞)「제석골」이라고 부른다. 사당(祠堂)은 후에 옥마산(玉馬山)으로 옮겨갔다.

玉 馬 山(옥마산)

남포면(藍浦面)과 대천읍(大川邑) 그리고 미산면(嵋山面)에 걸쳐있는 山을 옥마산(玉馬山)이라고 부른다. 산장(山頂)에 신라(新羅)의 마지막 왕(王) 경순왕(敬順王)의 사당(祠堂)이 있다. 이 사당(祠堂)을 김부대왕사(金傅大王祠)라고 부른다.

三 賢 里(삼현리)

백제(百濟)때는 사포현(寺浦縣)에 속했었다. 신라(新羅)때는 소포현(蘇浦賢)에 속했으며 고려(高麗)때는 남포진(藍浦鎭) 남포현(藍浦賢)에 속했었다. 조선(朝鮮)때에도 남포현(藍浦賢)에 속했으며, 조선말엽(朝鮮末葉)엔 남포군(藍浦郡) 북내면(北內面)의 지역(地域)으로서 산(山)이 줄처럼 되었으므로 「산줄」변하여「삼줄」또는 삼현(三絃)이라 하였는데, 1914年 행정구역(行政區域) 개혁(改革)때 조척포리(造尺浦里), 제석동(帝釋洞), 후동(後洞)의 名一部(각일부)와 옥라면(玉羅面)의 금암리(今庵里) 일부를 병합하여 삼현리(三賢里)라 해서 보령군(保寧郡) 남포면(藍浦面)에 편입(編入)되었다. `95.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 남포면이 되었다.

谷 洞(곡동)

「뒷골」 북쪽으로 골짜기에 자리한 마을을 곡동(谷洞)이라고 부른다. 또한「윷골」이라고도 부르는데 골짜기에 마을이 있다해서 곡동(谷洞), 「윷골」이라고 부른다.

뒷 골

원삼현(元三賢) 마을 뒤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뒷골」이라고 부른다.

三 谷(삼곡)

원삼현(元三賢) 남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삼곡(三谷)이라고 부른다.

三 賢(삼현)

「위뜸」아래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삼현(三賢)이라고 부른다. 산(山)이 줄처럼 되어 있어서 삼현(三絃)이라 부르다가 그 후 삼현(三賢)이라 하였다.

위 뜸

삼현(三賢) 위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위뜸」이라고 부른다. 마을 위쪽으로 마을이 있다해서「위뜸」삼상(三上)이라고 부른다.

元 三 賢(원삼현)

삼현리(三賢里)의 원 마을이라 원삼현(元三賢)이라고 부른다. 삼현리의 처음 마을이다.

巢 松 里(소송리)

마한(馬韓)때는 만로국(萬盧國)에 속한 지역(地域)이였다. 백제(百濟) 때는 사포현(寺浦縣)에 속했으며 신라(新羅)때는 소포현(蘇浦縣)에 속했었다. 고려(高麗)때는 남포현(藍浦縣)에 속했으며 조선(朝鮮)때에도 남포현(藍浦縣)에 속했었다. 조선말엽(朝鮮末葉)엔 남포군(藍浦郡) 북내면(北內面)의 지역(地域)인데, 1914年 행정구역(行政區域) 개혁(改革)때 소은동(蘇隱洞), 내송동(內松洞), 외송리(外松里), 봉산리(鳳山里) 一部(일부)와 군내면(郡內面)의 월촌(月村)일부를 병합하여 소은(巢隱)과 내송(內松)의 이름을 따서 소송리(巢松里)라 하여 보령군(保寧郡) 남포면(藍浦面)에 편입(編入)되었다. `95.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 남포면이 되었다.
이 곳에선 바위가 있어 先史時代부터 部落形成된것으로 推理된다.

南 洞(남동)

「사창굴」북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남동(南洞)이라고 부른다. 봉덕리(鳳德里) 南쪽으로 마을이 있다 해서 남동(南洞)이라고 부른다.

동 경 산

내송(內松) 북쪽에 있는 산(山)을「동경산」이라고 부른다. 산(山)모양이 동경처럼 생겼다 해서「동경산」이라고 부른다.

바 같 송 골

「송골」바깥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바깥송골」이라고 부른다. 외송(外松) 외송리(外松里)라고도 부르는데「송골」마을의 바깥쪽에 마을이 있다해서「바깥송골」이라고 부른다.

봉 화 터

「동경산」산봉(山峰)에 자리한 터를「봉화터」라고 부른다. 옛날에 나라에 큰일이 생겼을 때 봉화를 올렸던 터라「봉화터」라고 부른다.

사 당 골

소송리(巢松里) 가운데에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사당골」이라고 부른다. 옛날에 서당(書堂)이 있었던 터라「서당골」이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변해서「사당골」이라고도 부른다.

사 청 굴

「사당골」북(北)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사청굴」이라고 부른다. 옛날에 사창(社倉)이 있었던 마을이라「사창골」이라 부르다가 변하여「사창굴」이라고 부른다.

巢 隱(소은) 골

「바깥송골」안쪽으로 자리한 마을을 소은(巢隱)골「송골」이라고 부른다. 마을이 아늑하게 새 동우리 안쪽처럼 자리한 마을이다.

안 송 골

「송골」안쪽으로 자리한 마을이다.「내송」「내송동」이라고도 부르는데 「송골」마을의 안쪽에 자리해 있다 해서 「안송골」이라고 부른다.

여 수 고 개

남동(南洞) 북쪽에서 봉산(鳳山)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여수고개」라고 부른다. 옛날 여우(女孤)가 많이 사는 고개라「여수고개」라고 부른다.

원 청 머 리

「사당골」남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원청머리」라고 부른다. 마을에 장승도 박혀 있어서「장승배기」라고도 부르고 서낭당이 있어서「서낭당이」라고도 부른다.

칠 성 바 위

남동(南洞) 동(東)쪽으로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를 「칠성바위」라고 부른다. 바위 일곱 개가 북두칠성(北斗七星)처럼 나란히 서 있다. 별 일곱 개 같이 서 있다해서 칠성(七星)바위라고 부른다.

兄 弟(형제) 바 위

남동(南洞) 동쪽에 자리한 바위를 「형제바위」라고 부른다. 바위 둘이 형제(兄弟)처럼 나란히 서 있다 해서 형제(兄弟)바위라고 부른다.

孝 房(효방)

「안송골」「외송골」을 통털어 부를 때는 효방(孝房)이라고 부른다. 효자문(孝子門)이 서 있는 마을이라 효방(孝房)골이라고 부른다.

玉 西 里(옥서리)

마한(馬韓)때는 만로국(萬盧國)에 속한 지역(地域)이였다. 백제(百濟)때는 사포현(寺浦縣)에 속했으며 신라(新羅)때는 소포현(蘇浦縣)에 속했었다. 고려(高麗)때는 남포현(藍浦縣)에 속했으며 朝鮮때에도 남포현(藍浦縣)에 속했었다. 조선말엽(朝鮮末葉)엔 남포군(藍浦郡) 군내면(郡內面)의 지역(地域)인데 1914年 행정구역(行政區域) 개혁(改革)때 발산(發山) 사현리(沙峴里), 남리(南里), 동리(東里), 서리(西里)의 각일부를 병합하여 옥마산(玉馬山)과 서리(西里)의 이름을 따서 옥서리(玉西里)과 서리(西里)의 이름을 따서 옥서리(玉西里)라 하여 보령군(保寧郡) 남포면(藍浦面)에 편입(編入)되었다. `95.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 남포면이 되었다.

월 구 리

「새혀니재」북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월구리」라고 부른다. 또한 월촌(月村)이라고도 부른다. 마을 지형(地形)이 반달처럼 되어있다 해서 월촌(月村)「월구리」라고 부르며 그 一部(일부)는 남포 貯水池(저수지)의 수몰지구가 되었으며 金在一先生(김재일선생)이 사시던 곳이다.

새 혀 니 재

「월구리」남(南)쪽으로 고개가 있는데 이 고개를「새혀니재」라고 부른다. 사현(沙峴)이라고도 부르는 고개인데 웅천면(熊川面) 수부리「불근댕이」로 넘어 가는 고개이다.

바 람 박 기

「원구리」서(西)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바람박기」라고 부른다.「발산」이라고도 부른다. 마을에 천마시풍형(天馬嘶風形)의 명당(名堂)이 있다는 마을이다.

말 굴

「건정이」동(東)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말굴」이라고 부른다. 마동(馬東)이라고도 부르는데「말재」아래에 마을이 있다해서「말굴」, 마동(馬洞)이라고 부른다.

새 현

「월구리」남(南)쪽에 있는 고개 아래에 마을이있는데 이 마을을「새현」이라고 부른다.「새혀니재」아래에 마을이 있다해서「새현」,「사현」, 사현리(沙峴里)라고 부른다.

이 어 니 재

남포면과 웅천면을 이어지는 경계고개를 말한다. 이 고개에는 경찰충혼비와 합장묘가 있는데 6.25당시 철도경찰과 괴뢰군이 조우하여 격전을 벌이다 산화한 영혼들을 모시고 있다.


達 山 里(달산리)

마한(馬韓)때엔 만로국(萬盧國)이란 부락사회국가(部落社會國家)에 인접한 지역(地域)이였다. 백제(百濟)때는 사포현(寺浦縣)에 속했으며 신라(新羅)때는 소포현(蘇浦縣)에 속했었다. 고려(高麗)때는 남포진(藍浦鎭) 남포현(藍浦縣)에 속했다가 조선(朝鮮)때에도 남포현(藍浦縣)에 속했었다. 조선말엽(朝鮮末葉)엔 남포군(藍浦郡) 신안면(新安面)의 지역(地域)으로서 뒷산이 달처럼 생겼으므로 「달을」.「다리을」변하여「달월」달산(達山)이라 하였는데 1914年 행정구역(行政區域) 개혁(改革)때 야동(冶洞), 평촌(坪村), 소달리(小達里)와 대달리(大達里)의 일부 그리고 군내면(郡內面)의 월촌(月村) 일부를 병합하여 달산리(達山里)라 해서 보령군(保寧郡) 남포면(藍浦面)에 편입(編入)되었다. `95.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 남포면이 되었다.

볼 못 골

「점말」동(東)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볼못골」이라고 부른다. 야동(冶洞)이라고도 부르는데 마을에 들어오는 고개에 바위가 있는데 바위 안쪽으로 들어오면 부자(富者)가 된다 한다. 옛날에 부처가 있었던 마을이다.

호 구 리

「작은달월」동쪽에 있는 고개를「호구리」,「허구재」라고 부른다「웅천」으로 가는 길인데 길이 매우 험한 고개다. 옛날 며느리와 시아버지가 살고 있었다. 시아버지가 며느리 친정집에 나들이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길을 잃고 쓰러져 죽었다. 며느리는 이 고개에서 시아버지를 기다리다가 혼자 울면서 돌아오는데 호랑이도 그녀를 잡아먹지 않고 돌봐준 고개라 호구티(虎口峠)라고 부른다 한다.

호 짜 굴

「비선거리」남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호짜굴」이라고 부른다. 옛날 한 사람이 여기다가 산막(山幕)을 짓고 처음 정착하였을 때 죽을 때까지 혼자 살다 죽은 마을이라「호짜굴」이라 불러 왔었다.

진 개 울 고 랑

「동살미」남쪽으로 골짜기가 있는데 이 고개를「진개울고랑」이라고 부른다. 골짜기에 긴 개울이 있었다 해서「긴개울고랑」이라고 부르던 고개인데 변해서「진개울고랑」이라고 부른다. 옛날에 여기에「돛다리샘」,「진개울고랑샘」이라고 부르는 약샘이 있었는데 지금은 묻혀버렸다.

점 말

「비선거리」동(東)쪽에 자리한 마을을「점말」이라고 부른다. 점촌(店村)이라고도 부르는데 옛날에 옹기점이 있었다 해서「점말」,「점촌」이라고 부른다.

옻 새 암 골

「오야들」막바지에 있는 골짜기를「옻새암골」이라고 부른다. 약수가 나오는 옻샘이 있는 골짝기라「옻새암골」이라고 부른다.

솔 죽 뿌 리

「오야들재」서(西)쪽에 있는 모롱이를「솔죽뿌리」라고 부른다. 솔나무가 많이 있는 모롱이라「솔죽뿌리」라고 부른다.

사 작 뿌 리

「오야들재」서(西)쪽으로 끝에 있는 모롱이를「사작뿌리」라고 부른다. 옛날 남포현(藍浦縣)의 사직단(社稷壇)이 있었던 곳이라「사직뿌리」라 불렀는데 변해서「사작뿌리」라고 부르는 모롱이다.

비 선 거 리

「달산리」중앙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부터 비석(碑石)이 많이 서있는 거리라「비선거리」라고 부른다.

부 흥 재

「불뭇골」동(東)쪽에 자리한 고개를 부흥재(富興峠)라고 부른다. 웅천(熊川)으로 넘어가는 고개인데 이 고개 남쪽으로 둘레가 두 아름이나 되며 수령(樹令)이 200여년(餘年)되는 나무가 서있는데 이 나무를「부흥재서낭나무」라고 부르며 성황제(城徨帝)를 지낸다.

번 던 말
「동살미」서(西)쪽으로 평평한 바닷가에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번던말」이라고 부른다. 바닷가에 평평하게 자리한 마을이라「번던말」,「평말」, 평촌(坪村)이라고 부른다.

물 방 아 보

「불뭇골」서(西)쪽에 자리한 보를「물방아보」라고 부른다. 옛날에 보에 물방아간이 있었다 해서「물방아보」라고 부른다.

띄 섬

「번던말」서(西)쪽에 작은 섬이 있는데 이 섬을「띄섬」이라고 부른다. 섬이 들과같은 바다에 떠 있다해서「띄섬」이라고 부른다.

동 살 미

「번던말」동(東)쪽으로 산밑에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동살미」라고 부른다. 동산(東山)이라고도 부르는데「달월」의 달빛을 동쪽에서 밝게 받는 마을로 선비들이 자리할 마을이라 해서「동살미」라 부르는 시적 지명이다.

독 다 리

「동살미」동남쪽 골짜기에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독다리」라고 부른다. 마을 어귀에 돌다리가 있는데 돌다리 안쪽으로 마을이 있다해서「독다리」라고 부르며 골짜기안에 마을이 자리해 있다 해서「골말」이라고도 부른다.

큰 달 월

「달월리」의 큰 마을이다. 달산리(達山里)엔「달월」, 달산(達山),「다리을」「달을」이라고 부르는 큰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은 마을 뒷산이 달처럼 생겼다 해서 그리 부르고「달월」안의 큰마을을「큰달월」작은 마을을「작은달월」이라고 부른다.

다 락 굴

「작은달월」동(東)쪽으로 골짜기가 있는데 이 골짜기를「다락굴」이라고 부른다 마을 지형(地形)이 오목하여 다락처럼 생겼다 해서「다락굴」이라고 부른다.

오 야 들

「불못골」서남(西南)쪽에 있는 들을「오야들」이라 부르고「오야들」위에 자리한 골짜기를「오야들재」라고 부른다. 또한 봉덕리(鳳德里)에 있는 농장(農場)마을을「오야건너」라고 부르는데「오야들」건너에 자리한 마을이라「오야건너」라고 부른다.

대 달 의 신 령 나 무

대달(大達)마을에 큰 나무가 있는데 이 나무를「신령나무」라고 부른다. 옛날 마을에 아들을 육형제(六兄弟) 둔 한 노부부(老夫婦)가 살고 있었다. 그들은 원이 딸 자식을 하나라도 갖는 것이 원이였지만 끝내 그 소원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후 그 노부부(老夫婦)의 아들 육형제(六兄弟)는 장성해서 결혼을 하였는데 모두가 딸만 낳았다 한다. 아들하나 얻어보지 못한 형제들은 그래서 이것은 신령(神靈)님을 잘못 모셔서 이렇게 되었다고 이 나무에 제사를 지냈는데 아들을 얻게 해달라고 빌었다 한다. 아들 육형제(六兄弟)가 정성껏 제사를 지낸 나무라해서 신령(神靈)나무라고 부른다.

新 興 里(신흥리)

백제(百濟)때는 사포현(寺浦縣)에 속했었다. 신라(新羅)때는 소포현(蘇浦縣)에 속했으며 고려(高麗)때는 남포진(藍浦鎭) 남포현(藍浦縣)에 속했었다. 조선(朝鮮)때에도 남포현(藍浦縣)에 속했으며 조선말엽(朝鮮末葉)엔 남포군(藍浦郡) 신안면(新安面)의 지역(地域)인데 1914年 행정구역(行政區域) 개혁(改革)때 매천리(梅川里), 봉촌(烽村), 상신리(上新里), 하신리(下新里), 대달리(大達里) 일부를 병합하여 신흥리(新興里)라 해서 보령군(保寧郡) 남포면(藍浦面)에 편입(編入)되었다. 새로 이룩된 마을이 많은 지역(地域)임으로 「새말」, 신흥(新興), 신촌(新村)이라고 부르던 지역(地域)이다.
`95.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 남포면이 되었다.

烽 村(봉촌)
「새말」동(東)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봉촌(烽村)이라고 부른다. 옛날 고려(高麗)때에 오랑캐들이 자주 쳐들어 올 때 적이 쳐들어 왔을 때 봉화(峰火)를 올리던 봉수대(烽燧臺) 아래에 마을이 있다해서 봉촌(烽村)이라고 부른다.

동 구 산 못

봉촌(烽村) 남쪽으로 산이 있는데 이 산(山)을 동구산이라고 부 른다. 「동구산」북(北)쪽 아래에 못이 있는데 이 못을「동구산 못」이라고 부른다. 못의 넓이가 약(約) 백평(百坪)이 되는데 1966年에 만든 못이다.

매 내

봉촌(烽村) 북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매내」라고 부 른다. 매화낙지형(梅花落地形)의 명당(名堂)이 있다는 마을이라 「매내」매천(梅川)이라고 부른다. 매천(梅天) 동(東)쪽 못이 있는 이 못은「매천못」이라고 부른다. 넓이가 100평(坪)되는 못이다.

바 람 재

봉촌(烽村) 동남(東南)쪽에 있는 고개를 「바람재」라고 부른다. 웅천(熊川)으로 넘어가는 고개인데 바람이 몹시 센 고개라하여 「바람재」라고 부른다.

새 말

봉촌(烽村) 서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새말」이라고 부른다. 마을이 새로 생겼다 해서「새말」이라고 부른다.「새 말」위쪽으로 자리한 마을을「위새말」「새말」아래쪽에 자리한 마을은 「아래새말」이라고 부른다.

新 基(신기)

「새말」서남(西南)쪽에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새터」, 신 기(新基)라고 부른다. 마을이 새로 생긴 마을이다.

절 터

신흥리(新興里) 뒤에 있는 절터, 지금으로부터 700여년전에 절이 있었는데 하루는 동승(童僧)이 근처의 폭포(瀑布)에 나갔다가 빠 져 죽었는데 그후 동승의 넋이 절의 중을 괴롭히므로 모두 떠나 갔다 한다. 그래서 그때부터 절이 폐사(廢寺)가 되어 지금은 터 만 남아 있는데 여기를 「절터」라고 부른다.


梁 項 里(양항리)

백제(百濟)때는 사포현(寺浦縣)에 속했었다. 신라(新羅)때는 소포 현(蘇浦縣)에 속했으며 고려(高麗)때는 남포현(藍浦縣)에 속했었 다. 조선(朝鮮)때에도 남포현(藍浦縣)에 속했으며 조선말엽(朝鮮 末葉)엔 남포군(藍浦郡) 신안면(新安面)의 지역(地域)인데 1914年 행정구역(行政區域) 개혁(改革)때 양아리(梁牙里), 의항리(蟻項 里), 방항리(防項里)를 병합하여 양아(梁牙)와 의항(蟻項)의 이름 을 따서 양항리(梁項里)라 하여 보령군(保寧郡) 남포면(藍浦面) 에 편입(編入)되었다. `95.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 남포면이 되었다.

개 목

「양아다리」 북동(北東)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개 목」이라고 부른다. 양항리(梁項里)에서 으뜸되는 마을인데 지형 (地形)이 개미의 목처럼 생겼다 해서 「개목」, 「의항」의항리 (蟻項里)라고 부른다.

밤 섬

「개목」북(北)쪽으로 200m지점에 섬이 있는데 이 섬을「밤섬」이라고 부른다. 율도(栗島)라고도 부르는 섬인데 섬 모양이 밤처럼 생겼다 해서 「밤섬」, 율도(栗島)라고 부른다. 썰물일때는 걸어서 건너다닐 수 있는 섬이다. 섬엔 마을이 하나 있는데 섬명따라 「밤섬」, 율리(栗里)라 부르고 농가(農家)가 24호(戶) 인구(人口)는 146명이다. 샘이 네 개가 있고 농업(農業)이 주된 섬이다.

방 목

「개목」서남(西南)쪽으로 바닷가에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방목」또는 방항(防項)이라고 부른다. 바닷가에 있는 목이란 뜻에서「방목」이라 부르며 방항(防項)이라고 부른다.

숫 돌 번 덕

「방목」마을 앞 바닷가에 있는 모래톱을 「숫돌번덕」이라고 부른다. 바닷가에자리한 「모래톱」인데 옛날에는 바지락, 소라가 많았던 모래톱이다.

양 아 다 리

「개목」남서(南西)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양아다 리」라고 부른다. 마을이 다리처럼 생긴 지형(地形)이라 「양아 다리」, 양아(梁牙)라고 부른다.

陽 基 里(양기리)

백제(百濟)때는 사포현(寺浦縣)에 속했었다. 신라(新羅)때는 소포현(蘇浦縣)에 속했으며 고려(高麗)때는 남포진(藍浦鎭) 남포현(藍浦縣)에 속했었다. 조선(朝鮮)때에도 남포현(藍浦縣)에 속했다가 조선말엽(朝鮮末葉)엔 남포군(藍浦郡) 신안면(新安面)의 지역(地域)인데 1914年 행정구역(行政區域) 개혁(改革)때 양촌(陽村), 암촌(岩村), 상기동(上基洞), 하기동(下基洞), 냉전리(冷田里) 一部(일부)를 병합하여 양촌(陽村)과 기동(基洞)의 이름을 따서 양기리(梁基里)라하여 보령군(保寧郡) 남포면(藍浦面)에 편입(編入)되었다.
`95.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 남포면이 되었다.

講 堂(강당)

옛날에 강당(講堂)이 있어서 서생(書生)이 많이 출입했던 마을이다. 양촌(陽村) 동쪽에 자리한 마을이다. 강당(講堂)이 있었던 마을이라 마을 지명(地名)을 강당(講堂)이라 부른다.

갱 이 바 위

「골말」서쪽으로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를 「갱이바위」라고 부른다. 바위가 고양이 처럼 생겼다 해서「갱이바위」라 부른다.

골 말

「텃골」북동(北東)쪽 골짜기에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골말」이라고 부른다. 곡촌(谷村)이라고도 부르는데 골짜 기에 마을이 있다해서「골말」, 곡촌(谷村)이라고 부른다.

두 룽 이 재

곡촌(谷村) 동(東)쪽으로 고개가 있는데 이 고개를 「두룽이재」라고 부른다. 옛날 신안면사무소(新安面事務所)가 있었던 양기리(梁基里)에서 웅천면(熊川面)「두룡리」로 넘어가는 고개다. 「신안티」, 「두룡티」라고도 부르는데 「두룡리」로 넘어가는 고개라 「두룡티」라고 부르며 「두룽이재」라고 부른다.

새 밭

「신전」이라고도 부른다. 양촌(陽村) 북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새밭」이라고 부른다. 마을이 새로 생겼다 해서 「새밭」,「신전」이라고 부른다.

새 양 골

「아래텃골」서쪽에 있는 골짜기를「새양골」이라고 부른다. 고개에 샘이 있어서「샘골」이라고 불렀는데 변해서「새양골」이라고 부른다.

신 머 리

「텃골」서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신머리」라고 부른다. 「텃골」서쪽으로 앞에 자리한 마을이라「신머리」라 부르는데「텃골」다음에 생긴 마을이다.

陽 村(양촌)

「골말」북쪽에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양촌」이라고 부른다. 햇빛 밝은 곳에 자리한 마을이라 양촌(陽村)이라고 부른다.

윗 산 굴 다 랭 이 방 죽

「윗텃골」동(東)쪽으로 못이 있는데 여기를「윗산굴다랭이방죽」이라고 부른다. 못의 넓이는 약 500평이며 1965年에 준공을 본 못이다.

절 골

「윗텃골」동(東)쪽에 있는 골짜기를「절골」이라고 부른다. 옛날에 절이 있었던 골짜기라「절골」이라고 부른다.

참 샛 골

「윗텃골」동(東)쪽으로 골짜기가 있는데 이 골짜기를「참샛골」이라고 부른다. 찬 샘이 있는 골짜기가「찬샘골」이라 부르던 것이 변해서「참샛골」이라고 부르는 골짜기인데 골짜기엔 비조투림형(飛鳥投林形)의 명당이 있다해서 지관(地官)들이 많이 찾아드는 골짜기다.

텃 굴

「골말」서남(西南)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텃굴」이라고 부른다. 양기리(梁基里)에서 으뜸되는 마을인데 옛날엔 큰 소나무가 많이 있었다 한다. 그 소나무를 비여다가 나라에서 궁궐을 짓는데 기둥으로 썼다 한다. 터를 잡아주고 눌러주는 기둥의 재목(材木)이 나온 마을이라「텃골」기동(基洞)이라고도 부르는 마을이다.「텃골」위쪽으로 자리한 마을은「윗텃골」,「텃골」아래쪽에 자리한 마을은「아래텃골」이라고 부른다.

할 미 재

「아래텃골」남쪽으로 고개가 있는데 이 고개를「할미재」라고 부른다. 고개가 노고포화형(老姑抱花形)의 명당이 있다해서「할미재」라고 부른다.

月 田 里(월전리)

백제(百濟)때는 사포현(寺浦縣)에 속했으며 신라(新羅)때는 소포현(蘇浦縣)에 속했었다. 고려(高麗)때는 남포현(藍浦縣)에 속했으며 조선(朝鮮)때에도 남포현(藍浦縣)에 속했었다. 조선말엽(朝鮮末葉)엔 남포군(藍浦郡) 신안면(新安面)의 지역(地域)인데 1914年 행정구역(行政區域) 개혁(改革)때 월계리(月溪里)와 회전리(會田里) 일부를 병합하여 월전리(月田里)라 해서 보령군(保寧郡) 남포면(藍浦面)에 편입(編入)되었다. `95.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 남포면이 되었다.

용 (龍) 머 리

「대지울」북(北)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용머리」라고 부른다. 마을지형(地形)이 용(龍)의 머리처럼 생겼다 해서「용머리」라고 부른다. 바닷가에 용굴도 있는데 용이 하늘로 올라간 굴이라 한다.

大 月(대월)

「서빠탱이」북(北)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대월(大月)이라고 부른다. 「댈월」, 월계(月溪)라고도 부르는 마을인데 지형(地形)이 달모양같다 해서 대월(大月)이라고 부른다. 월전리(月田里)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대나무가 많은 마을이다. 옛날 이 마을에 사는 농부(農夫) 한사람이 중에게 시주를 하고 마을이 잘될라면 어떤 지명(地名)이 좋겠냐고 물었더니 큰 달이 좋다고 말함으로 대월(大月)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옛날에는 백씨(白氏)들이 많이 살았던 마을이다.

대 나 루

영전(令田) 서(西)쪽으로 나루가 있는데 이 나루를 「대나루」라고 부른다. 대섬으로 건너가는 나루라「대나루」라고 부른다.

竹 島(죽도)

「보리섬」서(西)쪽으로 1.5km 지점(地點)에 있는 섬을 죽도(竹島),「대섬」이라고 부른다. 옛날에 대나무가 울창하였던 섬이라「대섬」, 죽도(竹島)라고 부른다. 섬엔 집이 여섯채가 있으며 인구(人口)는 37名이다. 어업을 생업으로 하는 섬으로서 배가 다섯척 있는 섬이다.

병 풍 바 위

「보리섬」서(西)쪽 바닷가에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를「병풍바위」라고 부른다. 바위높이가 3m 너비가 1.8m되는 바위가 8개가 서 있었는데 세상이 바뀔 때 마다 하나씩 쓰러지고 지금은 성한 바위가 2個 남아 있다는 전설이 있는 바위다. 또한 바위 앞에 평평한 돌위에 밤 자시(子時)가 되면 도는 자마석(子磨石)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신라(新羅)의 문장(文章) 최고운(崔孤雲)의 선유지(仙遊地)로서 병풍바위에 글을 지어 새겼다하나 지금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보 리 섬

영전(令田) 서북(西北)쪽으로 자리한 섬을 「보리섬」, 맥도(麥島)라고 부른다. 썰물일때는 육지(陸地)이고 밀물일때는 작은 바위섬이다. 「병풍바위」가 있는 섬이다.

갱 이 바 위

남포(藍浦) 월전국민학교(月田國民學校) 앞 약(約) 200m지점에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를 「갱이바위」또는「고인돌」이라고 부른다. 約 300평의 야산(野山)에 세로 2.40m 가로 1.50m 두께 0.6m의 바위가 고여져 있는데 이 바위가 「고인돌」, 「갱이바위」라고 부르는 바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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